[해외칼럼]트럼프 시간끌기 방조하는 연방대법

여론독자부 2024. 3. 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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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마커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면책특권 심리 결정, 허송세월 탓
재판 일러야 9월 시작, 상황 꼬여
선거 피하려는 대법관 의도 반영
트럼프 지연전술에 장단 맞춘 꼴
[서울경제]

미국 연방대법원이 2020년 대선 뒤집기 시도와 관련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면책특권 주장을 7주 뒤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판결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오건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대법원의 이번 결정에 따라 당초 이달 4일로 예정됐던 대선 뒤집기 시도 혐의와 관련한 연방법원 재판은 2024 대선 이후 혹은 대선일 1~2개월 전인 9월 말이나 10월에야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혼란이 전적으로 연방대법원 탓은 아니지만 필요 이상으로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가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대법원의 심리 결정 자체가 아니라 지나치게 한가로운 타이밍이다. 최상의 타이밍은 잭 스미스 특별검사가 연방고등법원의 재판에 앞서 대법원이 대통령의 면책특권에 관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한 지난해 12월이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덧없이 지났다. 이번 결정에 따른 구두변론은 4월 22일에야 시작된다. 이 경우 대법원의 판결은 일러야 5월 아니면 회기가 끝나는 6월 말에 나온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대법원은 면책특권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3월로 예정된 연방 재판을 위한 준비를 허용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면책특권 심리를 빌미로 삼아 다른 연방 재판을 선거일 이후로 미루려는 트럼프의 계획은 틀어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연방대법원은 좀처럼 보기 드문 ‘회피 절차’를 밟았다. 대법원은 연방고등법원의 재판 개시 결정을 유예해달라는 트럼프 변호인단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재판 개시 유예와 동일한 효과를 내는 최고법원의 명령을 연방법원에 하달했다.

이번 결정으로 트럼프 관련 재판의 모든 재판 전 소송절차(pre-trial proceedings)가 동결됐다. 트럼프의 2020년 대선 패배 불복 및 불법 선거 방해 혐의 재판을 맡은 타니아 S 추트칸 연방 판사가 원고와 피고 측 모두 88일의 변론 준비 기일을 필요로 할 것으로 추산했기 때문에 재판을 재개하라는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온 후 석 달 가까이 지나야 비로소 본재판이 시작된다. 아무리 일러도 9월에야 재판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 경우 트럼프는 법원의 피고석에 앉아 있는 대신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재판을 연기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이처럼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는 지금 절충 같지 않은 절충의 표본을 보고 있다. 연방대법원이 ‘보수’ 쪽으로 완전히 기운 것을 생각하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현재 9인의 연방대법관 가운데 6명이 보수로 분류되는데 이들 중 세 명이 트럼프에 의해 임명됐다. 당파적 동기를 차치하더라도 보수적인 일부 대법관들은 재판 일정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통념에 적잖이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따라서 규칙적인 순서에 따라 이 케이스를 심리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연방 재판의 구두변론을 7월에 시작한다는 느긋한 심리 진행 속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법원은 심리를 앞당기고 싶은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콜로라도법원의 트럼프 공화당 경선 후보 자격 박탈 결정을 예로 들어보자. 트럼트는 올 1월 3일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결정을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연방대법원은 단 이틀 만에 상고를 받아들였고 2월 5일부터 심리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콜로라도 프라이머리가 슈퍼 화요일인 5일로 예정돼 있었던 만큼 시간이 촉박한 것은 인정한다.

지금의 사법부는 우리가 처한 문제 그 자체다.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만 연방대법원이 판결해야 할 문제에 어떤 프레임을 씌우냐에 따라 심리는 더 지연될 수 있다. ‘만약 특권이 인정된다면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행한 공식적 행동의 면책 범위는 어디까지인가’라는 프레임이 좋은 본보기다.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3인 재판부는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완전한 면책특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워싱턴DC 연방항소법원 3인 재판부는 트럼프의 행동이 대통령의 공무에 속하는지, 아니면 현직에서 물러난 대통령 후보에게 면책특권이 적용되는지 여부를 따지지 않았다. 만약 따졌다면 연방대법관들은 워싱턴DC 항소법원에 트럼프가 저질렀다는 공무에 속한 범죄행위를 가려내라고 판결할 수 있다. 이 경우 재판 진행은 더 지체됐을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 면책특권이라는 성공 가능성이 없는 카드를 꺼내든 것은 순전히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이 여기에 장단을 맞추면서 그의 카드는 부적 같은 효험을 발휘했다. 연방대법원은 속이 훤히 보이는 트럼프의 지연 전술을 방조하고 있다.

여론독자부 opinion2@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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