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힘으로 공화국을 구할 연설가는 어디에 [책&생각]
고전 20편으로 수사학 역사 읽기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태어나
아리스토텔레스-키케로 거쳐 정점
위대한 수사학 고전들
한국수사학회 지음 l 을유문화사 l 4만2000원
수사학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아테네 민주주의 번성 속에서 태어났다. 민주주의의 첫 번째 자식이 수사학이었다. 그런가 하면 수사학은 태어난 직후부터 ‘말의 힘을 악용해 정치를 병들게 한다’는 비판에 시달렸고, 그 민주주의의 두 번째 자식인 철학의 괄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수사학은 말하기와 글쓰기의 기술을 가르치는 능력 덕분에 철학의 냉대를 견디며 학문으로서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위대한 수사학의 고전들’은 이 학문의 고유한 영토를 확립한 수사학 고전 20편을 소개하는 책이다. 한국수사학회 창립 20돌(2023)을 기념해 김헌(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김월회(서울대 중문과 교수)를 비롯해 이 학회 회원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이룬 성과물이다.
이 책은 수사학 고전 20편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제1부에서는 서양 고대의 저술, 제2부에서는 동양의 저술, 제3부에서는 서양 근현대의 저술을 살핀다. 수사학이 서양에서 생긴 학문이기는 하지만, 그 수사학의 눈으로 동아시아 고전을 읽으면 거기서 수사학의 영토를 풍요롭게 해줄 생각의 씨앗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관점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논어’ ‘장자’를 비롯한 일곱 편의 문헌에 나오는 수사학적 사유를 들여다본다. 예를 들어 ‘주역’의 ‘문언전’에 등장하는 ‘수사’(修辭)라는 말에는 ‘말을 닦음으로써 품성과 지덕을 닦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수사’의 이런 동아시아적 의미는 수사학의 윤리적 함의를 키워나가는 데 지침이 될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나 수사학의 탄생과 발전의 경로로 보면, 수사학의 본령은 역시 고대 그리스에 있다. 오늘날 수사학으로 번역되는 ‘레토릭’(rhetoric)의 뿌리도 그리스어 ‘레토리케’(rhetorike)에 있다. 레토리케는 ‘레토르’(rhetor, 연설가)에서 파생한 말인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레토리케란 ‘연설가의 기술’을 뜻한다. 풀어쓰면 ‘연설가가 말로써 청중을 설득하는 기술’이 레토리케다. 그러므로 말과 글을 꾸민다는 오늘날의 의미는 수사학 탄생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레토리케를 철학적으로 검토해 글로 남긴 사람이 플라톤이다. 플라톤은 초기 저작 ‘고르기아스’에서 레토리케를 정치 언어를 타락시키는 ‘사이비 기술’이라고 비판했다가, 중기 작품 ‘파이드로스’에 이르러서는 ‘말로써 혼을 이끄는 기술’이라고 좀 더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레토리케가 진리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철학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레토리케를 통해 높은 수준의 개연성을 지닌 좋은 의견들을 제시할 수 있고, 그런 의견으로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수도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플라톤의 논의를 이어받되 플라톤보다 훨씬 더 본격적으로 수사학을 해부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다. ‘수사학’이라는 저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연구 대상이 ‘연설가의 기술’이라고 명확히 규정했다, 또 연설을 ‘심의 연설, 법정 연설, 기념 연설’ 세 가지로 나누었다. 심의 연설은 의회에서 하는 정치적 연설이고, 법정 연설은 소송 당사자가 하는 연설이며, 의례 연설은 국가 차원의 의식에서 하는 연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핵심이 ‘설득’에 있다고 보고 설득의 세 요소도 밝혔는데, 연설가의 품성(에토스), 연설의 논리(로고스), 청중의 감정(파토스)이 그 셋이다. 연설이 목표에 이르려면 연설가의 품성에 대한 청중의 신뢰가 있어야 하고, 주장이 충분한 논거를 통해 입증돼야 하며, 그 결과로 청중의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의 기술적 차원을 중립적으로 다루었지만, 연설 기술의 궁극적 목표가 공동체 안에서 정의를 세우는 데 있음도 함께 강조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확립한 수사학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한층 더 발전했는데, 그 발전의 정점에 선 사람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다. 키케로는 수사학에 관한 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독보적인 인물이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 정치가로 산 키케로는 오직 말의 힘으로 최고위직인 집정관에까지 올랐다. 집정관 시기에 ‘카틸리나 음모’를 네 번의 연설로 분쇄함으로써 ‘국부’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정점에서 정적의 공격을 받고 1년 동안 추방당했고, 추방에서 돌아온 뒤에는 삼두정치 세력 사이에서 공화정을 지키려 분투하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키케로가 쓴 것이 ‘연설가에 대하여’(De Oratore)다. 키케로의 인생역정이 보여주듯, 이 작품은 연설의 힘이 최절정에 이르렀다가 삼두정치 세력의 무력에 그 힘이 꺾이기 시작하는 때에 등장한 작품이다.
눈여겨볼 것은 키케로가 이 수사학 저작의 제목을 ‘연설가’로 잡았다는 사실이다. 수사학에서 관건은 ‘연설 기술’이 아니라 ‘연설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 소홀히 다룬 ‘연설가의 윤리적 측면’에 한층 더 주목해 ‘이상적인 연설가’에게 필요한 세 가지 능력을 이야기한다. 첫째가 모든 영역을 두루 꿰뚫어 볼 수 있는 지적 능력이다. “사태를 객관화하여 보편의 지평에서 다룰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연설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키우려면 연설 기술만 연마해서는 안 되고, 논리학‧자연학‧윤리학을 포함한 철학적 앎을 갖추어야 한다. 둘째, 상황과 주제를 파악해 연설의 리듬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다. “섬세한 주제는 정밀하게, 무거운 주제는 장중하고 숭고하게, 일상적 주제는 가볍고 부드럽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이상적인 연설가다.
셋째로 키케로가 제시하는 것이 윤리적 능력, 다시 말해 “공동체에 대한 의무감”이다. 정치 활동은 공동체의 일에 참여해 공공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이기에 이 능력이야말로 연설가가 반드시 갖춰야 할 능력이다. 이 세 가지 능력을 두루 갖추었을 때 ‘이상적인 연설가’라고 할 수 있다. 키케로 편을 쓴 안재원(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은 이 ‘이상적인 연설가’가 ‘이상적인 정치가’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키케로는 이상적인 연설가의 상을 그려냄으로써 말의 힘으로 정의를 실현하고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할 참된 정치가의 상을 찾았던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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