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밀실’의 발소리와 경련을 시는 겪는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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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미의 두 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에 수록된 몇몇 시편은 이 세상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회수하는지 촘촘하게 분절하여 기록한다.
하지만 박세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의 확장적인 시도 그 자체보다, 사물의 자리로 회수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에 대해, 그것이 지금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가늠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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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사회 발코니
박세미 지음 l 문학과지성사(2023)
박세미의 두 번째 시집 ‘오늘 사회 발코니’에 수록된 몇몇 시편은 이 세상에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 어떻게 사람들의 시선을 회수하는지 촘촘하게 분절하여 기록한다. 이를테면 ‘순환세계’에서 시인은 새로운 아파트를 들이고자 원래 있던 80년대식 주공아파트를 허물어뜨린 자리에 파인 “협곡”을 향해 “두 눈동자를” “내던”진다. 그러면 “눈동자”가 “덕지덕지 붙어” 그곳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의 사연을 “오늘”의 이름으로 지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보도블록 언덕”이나 “벚나무의 검은 가지”, “자전거 보관대” 주위에서 놀던 아이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시는 거기에 살았던 “아이”가 “잃어버”린 것이기도 할 “눈동자”가 끝내 감기지 않는다는 얘기를 마저 꺼낸다. 압도적인 재개발의 현장을 만드는 “협곡 위 가장 구체적인 두 손”을 의식하는 자리에 ‘그것’이 내내 남아 있을 거라고.
시란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다양하게 실험될 수 있는지 사물의 언어를 설계함으로써 보여주는 장르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세미의 시를 읽다 보면 시의 확장적인 시도 그 자체보다, 사물의 자리로 회수된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에 대해, 그것이 지금을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조금 더 가늠해보고 싶어진다.
“1976년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받은 설계 의뢰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을 것이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 눈에 띄지 않을 것./ 눈을 가리면 모든 것이 두려울 것./ 이곳에서는 거짓이 진실이 될 것.// 그리고 건축가는 홀로 그 목록을 오랫동안 읽다가 마지막 문장을 추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건축은 완벽할 것.// 건축은 완벽에 가깝게……눈이 가려진 채 들어온 자들은 살아서, 혹은 죽어서 나갈 때까지 그 실체를 몰랐으며, 눈을 당당히 뜨고 다니던 자들은 건축이 제공하는 미와 쾌적함을 알았다.// 그로부터 10년 후 건축가는 죽었다./ 또 그로부터 30년 후 촛불이 서울의 곳곳을 밝혔다./ 건축물의 정치적 이용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입증된다// 그것과 상관없이, 2020년에 우리는 겪는 것이다./ 도면 위 원형 계단 그리는 소리와 몇 층인지도 모른 채 끌려 올라가는 자들의 발소리가 겹치고, 좁고 깊은 창문으로 뚫고 들어온 실빛에 상처 입은 자들의 경련이 벽을 타고 내려오며, 밀실의 용도와 치장 벽돌 쌓기의 무관함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부정적 유산’ 전문)
시의 원문에는 “건축물의 정치적 이용 가치는 시대를 막론하고 입증된다”는 구절이 ‘민주와 인권의 현장, 남영동 대공분실’(집, 2019)에서 인용해왔다는 안내가 각주로 달려 있거니와, 이 시는 건축가가 의뢰받은 목적에 부합한 건축물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말한다. 혹은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세상에 위압적인 힘을 내보이기 위해 ‘말 없는’ 건축물로 많은 이들의 시선을 회수해갔던 정치세력이 있었노라 ‘말하는’ 건축물이 우리 역사에 분명히 있음을 보여준다고. 2024년의 우리는 안다, 기술적인 “완벽”에 이르기 위해 활용됐을 “치장 벽돌 쌓기”도 밀실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을 뿐임을. 저 건축물 곳곳에 내내 남아 있을 “발소리”와 “경련”을 역사로부터 등 돌리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받아들일 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 실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 또한 제대로 세울 수 있다고.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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