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에서 번역가로, 또 편집자로…“성공한 덕후죠” [책&생각]
일본 유학파 미술사학자·번역가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파트너
“세계관에 균열 내는 책” 만들려
유리병 띄우듯 출판업도 시작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세찬 물줄기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헛수고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희생 없이는 애당초 어떤 열매도 맺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대학을 갓 입학한 역사학도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의 이 구절에 ‘울컥’했을 때만 해도 30년 뒤 그가 서경식 선생의 번역자로, 또 편집자로 살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엔 반독재운동, 인권운동을 하던 서승·서준식 선생님을 먼저 알았어요. 그분들의 동생인 서경식이라는 분이 미술에 대해서 썼다고 하니까 그분이 쓴 미술 이야기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하고 읽었다가 충격을 받았지요.”
한양대 역사학과를 졸업한 최재혁 번역가는 서울대 대학원과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로 석사·박사과정을 마쳤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서경식 선생의 세미나를 찾아가 인사를 드리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출판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경식 선생님이 한국의 예술가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한 뒤 책을 쓰고 싶어하는데, 인터뷰 단계에서부터 동행해 얘기도 나누면서 번역도 맡아줄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가능하실까요?” 출판사가 번지수를 제대로 찾은 것이었다. 일본어가 가능한 미술사 전공자에 이미 몇 권의 미술서 번역 이력도 있는 그야말로 서경식 선생의 파트너로 맞춤이었다. 이때부터 ‘나의 조선미술 순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 ‘나의 일본미술 순례’ 등 서경식 선생의 인문예술서는 줄줄이 그가 맡았다. 특히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통해서는 서경식 선생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때론 사제지간처럼 때론 친구처럼 때론 동지처럼 끈끈한 정을 쌓았다. 그는 “사람들이 저더러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부른다”며 웃었다.
번역자와 원작자가 이렇게까지 깊은 인연을 맺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일까? 그가 번역한 책들을 읽으면 서경식 선생의 한숨과 침묵, 숨소리까지 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번역관에 대해 “작가의 리듬감을 잘 살리는 번역, 원작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나의 리듬감도 살짝 얹을 수 있는 번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경식 선생은 지난해 12월18일 향년 72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날은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맺음말을 보낸 바로 다음날이었다. “서경식 선생님을 잘 아는 분들은 말하죠. 그분이 여태까지 저렇게 글을 쓰고 싸워왔던 삶의 기반은 친절함이었다고.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는 번역으로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선생님이 쓰고 싶은 책들에 격려도 드리고 나아가 저자에게 도전하는 편집자도 되어 같이 만들어가고 싶었던 계획들이 많았는데…. 너무 아쉽죠.”
서경식 선생의 책 말고도 미술서, 인문서도 다수 옮겼다. 그중 ‘무서운 그림2’는 독자들의 반응이 좋았고,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는 출판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유학을 마친 뒤 미술사학자로 강단에 6년 정도 섰다가 지난 2022년에는 출판사 ‘연립서가’를 차렸다.
“미술사학자로 논문을 쓰고 학회에 나가고 강의를 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논문 말고 책으로 좀 더 넓게 소통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서경식 선생님이 파울 첼란의 말을 빌려 한 말씀도 떠올랐어요. ‘글을 쓰는 일은 외딴섬에 표류하는 사람이 유리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흘려보내는 통신과 같다. 이 부서지기 쉬운 작은 병이 없다면 작가나 시인이 외부나 미래를 향해 통신을 할 수 없다’고. 출판은 유리병인 셈이죠. 그 말에 작은 유리병을 바다에 띄울 용기를 냈죠.”
연립서가에서 처음으로 펴낸 책도 ‘서경식 다시 읽기’이다. 이 책은 최재혁 번역가와 김연수 소설가, 조해진 소설가, 서동진 교수, 윤석남 화가 등이 자신의 삶에 ‘서경식 읽기’가 드리운 균열과 의미를 고백한다. 두 번째 펴낸 책도 서경식의 ‘나의 일본미술 순례 1’이었다. 설립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출판사이지만, ‘표구의 사회사’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등이 세종도서에 선정되는 등 순항중이다. 그의 전공을 살린 미술서적도 출간하지만 “독자들의 세계관을 흔들어 균열을 내는 책을 펴내는 것이 출간 방향”이다.
그는 최근에도 5박6일 일정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서경식 선생님의 아내분과 함께 유품과 원고, 자료들을 정리하느라 다녀왔어요. 선생님의 방대한 자료들을 어떻게 하면 아카이브화할 수 있을지 여러분들과 논의 중이에요. 되돌아보면, 저의 많은 작업이 서경식 선생님을 매개로 연결된 인연의 결과물들이었어요. 앞으로도 어떻게든 서경식 선생님의 유산을 이어가야지요.” 올해 연말에는 서경식 선생의 1주기를 맞이해 ‘나의 일본미술 순례 2’가 나올 계획이다.
글·사진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이런 책들을 옮겼어요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에 이은 서경식의 ‘나의 인문 기행’ 시리즈의 마지막 책. 에드워드 호퍼, 디에고 리베라 등 작가와 작품을 통해 ‘선한 아메리카’ 나아가 ‘선한 세계’를 짓기 위한 사유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최 번역가는 “서경식 선생의 책 중 가장 동시대적 느낌이 있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서경식, 반비(2024)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일본’이라는 질곡 아래 발버둥치면서 보편적인 미의 가치를 추구하며 싸워나간 일본 미술계의 이단자들의 삶과 작품을 통해 ‘근대 일본’을 성찰한다. “근대기에 일본에 침윤당한 한국의 미의식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라고 최 번역가는 추천했다.
서경식, 연립서가(2022)
성스러운 동물성애자
이상성욕(변태) 또는 유사범죄로 여겨지는 동물성애. 세계 유일의 동물성애자 옹호단체 ‘제타’ 취재를 통해 인간에게 가장 절실한 질문인 인간, 사랑, 섹스의 본질을 묻는다. “단순히 성의 문제가 아니라 타인이나 세계와 어떻게 관계맺을 것인가를 질문함으로써 사고의 전환을 일으키는 책”.
하마노 지히로, 연립서가(2022)
재일의 연인
일본 진보적 아티스트가 ‘재일코리안을 향한 당신의 혐오감은 도대체 뭐야’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시작된 작품 작업의 기록을 담으면서 사회 속에 내재된 지배자와 차별, 억압의 시스템을 고발한다. “번역한 책 중 가장 안 팔린 비운의 책이지만 너무나 재미있는 책으로 곧 절판될 수 있으니 빨리 읽으시라!”고 권유.
다카미네 다다스, 한권의책(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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