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칼’…시인은 웃어도 웃는 게 아니라서 [책&생각]
두번 묶었다 자진폐기 끝
“암담한 현실과 대결 위한 시”
정치·자본·일상 등의 ‘기원’
유희·자조·알레고리로 가늠
세계문학전집
권혁웅 지음 l 타이피스트 l 1만2000원
시인 권혁웅(57)의 신작 시집 ‘세계문학전집’에는 현재와 현상의 ‘기원’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하다. 이런 태도, 이런 질문과 통한다, ‘아놔’ 어디서부터 뒤틀렸는가. 기원은 역사 이전의 역사, 언어 이전의 언어에 있으므로, 우발성과 지적 탐구, 언어의 변이 따위가 없인 가닿기 어렵겠다. 시인은 시집 말미 덧붙인 산문 ‘부정신학과 종이옷’에 시(형태)론적 아포리즘을 추려뒀는데, 한 토막 참고될 만하다. 한 물고기와 이 물고기에게 열매를 제공하는 한 나무를 모두 “bokorn”으로 부르는 호주 원주민의 이야기다. “bokorn(나무)에 가봐, 그러면 bokorn(물고기)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시는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는 불가능한 지시작용이다.”
여러 시에서 의뭉스레 역사, 지도, 철학, 물리를 구부리고 접어 부조리의 시대, 너절한 일상과 맞대보려는 이유일 터, ‘불가능한 지시작용’으로 겨우 그때와 이때, 그곳과 이곳, 당신과 나 너머 기원을 찾아간다. 두 지점 사이를 가늠하려는 손 한 뼘씩이 바로 권혁웅의 시다.
“생후 두 달 된 딸아이의 볼에 손바닥을 대보다가/ 판게아를 떠올린다/ 판게아는 3억 년 전 모든 대륙이 하나였을 때/ 그 대가족을 부르는 이름,/…/ 인류의 기원은 아프리카라고 하니/ 이 손바닥은 아비의 것이 맞겠다/…/ 손은 오랜 세월을 기다려/ 대서양을 건너/ 딸의 통통한 볼에 가닿으려 했구나/…/ 저 볼이 숨기고 있는 아마존,/ 그 광대한 물길의 초입에는/ 아프리카의 해안선을 밀어내고 틈틈이/ 엄마가 접안을 시도한다/ 아이는 그렇게 페루처럼 높아지거나/ 칠레처럼 키가 자랄 것이다”(‘남미 기행’)
관계의 원류를 헤아려가는 방편이랄까. 마찬가지 산문으로 부연이 된다.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너를 들여다본다.’(니체, ‘선악의 저편’) 마치 심연이 사랑하는 이의 이름이기나 한 듯이. 심연씨, 당신도 나를 보고 있군요. 고마워요.”
시집은 질문이 많다. “뎅강 뎅강” 나온다. ‘지옥’도 재현 못 하는 현실에서 ‘질문’이란 게 갖는 행색이다. 이렇듯 ‘주거’의 연원됨도 반복하여 캐물어진다.
“칠성판에 눕는다는 건 어떤 느낌입니까?/ 두툼하게 썬 광어회를 손으로 집을 때/ 그런 느낌입니까?// 아니면 운동화 신고 빗길 걸을 때/ 발가락으로 스며드는 빗물…… 같은 겁니까?// 죽은 이들을 위한 영구임대주택,/…”(‘월하의 공동묘지’)
백석(시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과 붙여본다. “이 아파트는 맨천 귀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이 아파트는 온데간데 귀신이 돼서/ 나는 이 아파트를 분양받은 게 잘못이다”(‘신비아파트 캐릭터 도감’)
소월과 붙여본다. “집주인이 2년 만에 엄마더러 나가라고 했다/ …/ 이사 나가는 날, 마스크 쓰고 들어와 휘 둘러보더니/ 화장대 위에 못 박은 자리 하나를 짚었다/ …/ 그예 벽지 긁힌 값 20만원을 받아 갔다/ 엄마야 누나야/ 난 지금도 날마다 부동산 사이트를 검색해 본다/ 집주인이 정말로 자기 집에 들어와 사는지 보려고/ …/ 말하자면 우리 일가는 카프카처럼/ 성(城)에는 끝내 들어가지 못한 셈인데/ K는 바둑의 축머리 같은 것일까/ 아무리 몰아붙여도 나는 여기 있다고/ 풍선 인간처럼 버둥거리는 이 손을 보라고/ …/ 요는 그때까지 내가 기다릴 수 있을 것인가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소풍 갈 날을 기다리듯/ 엄마야 누나야 그런데 우리/ 강변 못 산다/ 강 조망권 있는 집은 너무 비싸다”(‘엄마야 누나야 카프카야’)
히죽이다 묻게 된다. 그러니까 ‘사는 데’로부터 ‘사는 일’과 ‘사는 자’가 소외되는 실태는 백석과 소월의 때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과연 본래 ‘집’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시집 전반으로, 말재간도 자조도 천연스러워 ‘나’는 곧 읽는 나들을 포섭할 만하다. 권혁웅은 2000년대 전위·실험적 시류(詩流)를 “미래파”(평론집 제목)라 부르며 지지한 비평가로도 알려져 있다. 시를 품는 방식이지 자신이 시를 짓는 방식은 아님을 이전 시들로 보여왔다. 미래파의 시어와 시어 사이가 행성과 행성의 거리라면, ‘애인은 토막 난 순대처럼 운다’(2013)에서처럼 권혁웅은 마을과 마을의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정작 시의 ‘미래’가 흐릿해진 판국에, 시인은 장동건, 골목식당, 배달의 민족에 관해 쓰며 일상의 본질을 바로 그 위태로운 ‘시’로 보존하고자 한다. 급기야 근대사회 추방자로서의 시인(‘저주받은 시인들’, 폴 베를렌)을 자처한달까. 또한 능청스럽게 말이다.
“나는 한평생 파를 피해 다니며 살았다/ 물컹하고 축축한 식감을 견딜 수 없었다/ 육개장은 무서웠고 설렁탕은 번거로웠다// “이 세계에 맞지 않는 것만이 참일 것이다”(아도르노)// 파들의 나라에서 나는 추방당했다/ 나는 미래파도 과거파도 될 수 없을 것이다”(‘파에 관한 명상’)
검찰의 본원도 묻는다. 7일 한겨레에 말한 대로다. “지금 정치, 한국 현실이 암담하다. 시를 통해 웃음으로 극복하거나 대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제목 ‘검설(劍說)’.
“세상이 도(道)와 도(刀), 검(儉)과 검(劍)을 구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에 와서는 할복할 때 목을 치는 것이 인(仁)이요, 등을 찌르지 않는 것이 의(義)요, 급소만 노리는 것이 예(禮)요, 차도살인이 지(智)니, 오호라, 이로써 제 몸에 쇠붙이를 들지 않으면 패(覇)나 권(權)을 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제 살을 쇠에 붙이는 것이니 자신을 고깃덩이로 저울에 내주는 일이 아닌가? 경계하는 뜻으로 세상에 알려진 검을 논한다//…/ 무인도(無人刀)는 전장이 6척이나 되는 양손검의 일종이다 한 번 휘두르면 사방의 적이 사라진다 문제는 같은 편마저 쓰러진다는 것, 무인도를 쓰는 검사를 독고다이라 하는데 고독사와 어원이 같다 혹은 안하무인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이번 시집은 11년 만의 것이다. 그사이 시집으로 묶었다 엎길 두 차례. 권 시인은 한겨레에 “먹고살고 지지고 볶는 세속에 미학이 있다고 믿었다”면서도 “다만 묶어놓고 보니 이전 방식(느낌, 소재 등)의 반복 같아 도저히 못 내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4~5년 새 쓴 시들로 꼴을 갖췄다. 공교롭게 “괜찮지 않”아진 세계가 일조한 모양이다.
‘세계문학전집’은 갓 시작한 ‘타이피스트 시인선’의 첫 권이기도 하다. 시인 박은정이 차린 출판사가 최근 시작한 기획이다. 시인선 두번째 시집(‘아사코의 거짓말’)의 저자이기도 한 박 시인은 “작품보다 시인의 이름, (등단 신인의) 첫 시집, 대형출판사 중심으로 시가 출간되는 흐름에서 벗어나 시 자체를 선별해 소개하고, ‘믿고 읽을 수 있겠다’는 시인선을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다연, 김이듬, 양안다, 이기리 시인 등이 예정하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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