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와 훈은 ‘아무 것도 남기지 않은’ 파괴자일까? [책&생각]
정치·군사적으로 잘 조직된 국가
‘야만과 파괴’라는 고정관념 비판
“인류사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흉노와 훈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김현진 지음, 최하늘 옮김 l 책과함께 l 2만원
서기전 1세기 인물인 왕소군은 양귀비, 서시, 초선(또는 우희)과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힌다. 흉노와 화친을 꾀한 전한의 원제가 흉노 지도자 선우의 혼인 요청에 응해 궁녀였던 소군을 보냈는데, 머나먼 오랑캐 땅으로 떠나게 된 소군의 심정을 여러 문인이 시로 노래했다. 이백과 백거이의 시도 유명하지만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작품은 동방규의 ‘왕소군의 원망’(昭君怨)일 것이다. 전체 3수로 된 이 연작의 마지막 수 중 “변방 땅이라 꽃과 풀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는 대목에서 ‘춘래불사춘’이라는 숙어가 비롯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흉노는 지금의 내몽골에 해당하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래했다. 전통 중국 역사서에서 흉노는 “일관되게 잔혹하고 오만한 오랑캐로, 이들의 중국 통치는 불법적인 데다 순전히 파괴적이기만 했다고 묘사되었다.” 그런가 하면 흉노와 동일한 뿌리를 지닌 ‘훈족’ 역시 유럽 역사에서 “말할 수 없이 흉포하고 파괴적이며 야만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 흉노와 훈에 관한 이런 평가는 과연 올바른 것인가.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대학 고전학·고고학 교수 김현진이 쓴 ‘흉노와 훈’(2016)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적으로 세련된 존재였고, 아주 잘 조직되었으며, 군사적으로도 서방과 동방의 적수들을 압도”하는 등 “제국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국가 또는 초기 국가였다”는 게 그의 평가다.
“이 책은 아주 혁신적인 시각을 제시하고자” 한다고 지은이는 밝히는데, 그 말대로 책은 흉노와 훈에 관해 형성된 단단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세계사에 출현한 흉노와 훈이 동일한 집단이라는 주장부터가 그러하다. “훈(Hun)이라는 이름 자체가 고대 흉노에서 나왔다는 것이 분명하게 밝혀졌”으며, “몽골과 중국에 군림했던 흉노 제국과 유럽-중앙아시아의 훈 제국이 같은 이름을 집단명으로 사용했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그는 단언한다.
초원의 ‘유목민’이었던 이들이 정처 없이 떠돌아 다녔다는 오해 역시 바로잡는다. 이들은 “모두 명확한 영토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목축민으로서 고정된 초지를 오가며 생활했다. (…) 흉노 사회는 순수 유목 사회가 아니라 농경·목축 사회였다.”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3세기 사이에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흉노와 서기 4~5세기에 세력을 떨친 유럽의 훈 제국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집단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지은이는 “훈을 하나의 민족이나 종족 집단으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훈(흉노를 포함하는)은 “종족과 민족, 종교적으로 다양한 부류가 함께 소속된 복잡한 정치체”이며 “훈이라는 이름은 내륙아시아 제국 통치의 개념을 일컫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 군주의 아래에 4명의 부왕을 두고, 여섯 명의 최고 귀족으로 구성된 평의회가 존재하는 중앙집권적 준봉건제가 그 통치 구조의 특징이다.
흉노와 훈의 활동 배경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만큼, 이 집단의 역사와 유산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라시아적 시각이 필요하다. 지은이는 흉노를 다룬 중국 사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서기 2세기 중반부터 서기 4세기 중반 사이 흉노-훈의 흔적이 지워진 듯한 ‘200년의 공백’을 해명하며, 선비족에게 패배한 뒤 ‘사라진’ 북흉노가 알타이 지역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진출했음을 밝혀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가령 지난해 나온 ‘흉노 유목제국사: 기원전 209~216’(정재훈)과 함께 읽으면 좋을 듯하다.
서기 370년대에 그리스·로마 사료에 처음 등장한 유럽의 훈 집단은 알란과 고트 집단을 차례로 격파하고 로마 제국을 위협하며 5세기 아틸라 왕의 치세에 유럽 대륙 거의 전체를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위세를 과시했다. 아틸라와 훈 군대의 위력에 놀란 어느 연대기 작가는 이렇게 쓸 정도였다. “과거의 어느 전쟁보다 거대한 전쟁이 아틸라 왕에 의해 우리에게 닥쳐와 거의 유럽 전체와 도시들, 성채들을 침공하고 약탈했다.” 흉노가 중화 제국의 두 수도 낙양과 장안을 점령하고 불태웠으며 진의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가 결국 처형한 것과 비슷하게, 유럽의 훈 역시 로마를 약탈하고 서로마 황제를 속신으로 삼고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며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을 몰락시켰다.
그렇게 고대 로마 제국에 파멸을 초래한 훈 집단은 “많은 파괴와 혼란만을 일으킨 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고 흔히 생각된다.” 그러나 “훈의 유산은 로마의 유산만큼이나 중대하고, 오랜 흔적을 남겼고,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 모두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고대 로마 제국이 해체된 뒤 유럽 전역에 도입된 봉건제 통치 체제는 새로운 유럽, 즉 ‘중세 유럽’의 시작을 알렸다. “여기서 말하는 ‘봉건제’는 대왕과 대체로 ‘제왕’이라 불리거나 서유럽에서는 이전부터 있던 로마식 호칭 ‘둑스’(공작)라 불린 주요 봉신들 사이에 공식적으로 권력을 통제하고 나누는 제도를 가리킨다.” 이와 함께 훈의 기마 부대 핵심 장비인 철제 등자를 통해 중세 유럽의 기사와 기사도적 가치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훈과 알란의 예술과 물질문화는 “게르만계 서유럽 왕국들에 충격을 주어 현재 ‘중세 초기 양식’이나 ‘다뉴브 양식’이라 부르는 혼성적이고 혼종적인 예술 사조의 탄생을 이끌었다.”
이렇듯, 훈이 남긴 유산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한 지은이는 그동안 오해와 편견에 시달려 온 훈의 역사와 그 의미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훈과 내륙아시아의 역사는 세계사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제 훈을 비롯한 내륙아시아인들은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응당 위치할 때가 되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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