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지라르 “현대 전쟁은 모방적 인간의 극단적 경쟁 행위…자멸 위험 커” [책&생각]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
계몽주의 이성이 아닌 모방적 이성으로 본 전쟁론
르네 지라르·브누아 샹트르 지음, 김진식 옮김 l 한길사 l 3만5000원
르네 지라르(1923~2015)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폭력과 성스러움’ 같은 저작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문학비평가이자 사회인류학자다. 지라르의 작업은 대개 문학 작품 분석을 통해 폭력과 구원에 관한 주제를 탐사하는 데 집중한다. 첫 저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을 ‘모방’이라는 관점에서 해부했으며, 이후 모방이론은 다른 모든 저술의 출발점이 됐다.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는 지라르가 노년에 이르러 프랑스 문학평론가 브누아 샹트르와 한 긴 대담을 엮은 지라르의 마지막 저작이다. 2007년에 초판이 출간됐고 2022년 샹트르의 ‘머리말’이 추가돼 재판이 나왔다. 이 2022년 판을 지라르 연구자인 김진식 울산대 명예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는 모방이론을 독일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전쟁론’을 분석하는 데 적용한 저작이다. 클라우제비츠는 프로이센 장교로 1806년 나폴레옹의 예나 전투에 참전했다가 붙잡혀 파리에서 포로 생활을 하기도 했고,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동맹군 일원으로 참전했다가 탈출한 뒤 러시아 군대에 들어가 나폴레옹 군대와 맞서 싸우기도 했다. 이 경험을 바탕에 깔고 생의 마지막 12년을 바쳐 쓴 것이 ‘전쟁론’이다. 지라르는 이 ‘전쟁론’을 텍스트로 삼아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의 내적 관계를 해부하고, 더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현대 전쟁의 성격을 해석한다.
‘전쟁론’을 읽는 지라르의 관점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한 고유한 통찰을 밀고 나가다 중도에 돌아서고 말았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게 돌아선 탓에 이 저작은 미완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클라우제비츠의 애초의 통찰을 끝까지 밀어붙여 ‘전쟁론’을 완성해야 한다. 여기서 이 책의 제목(‘클라우제비츠 전쟁론 완성하기’)이 나왔다.
지라르는 ‘전쟁론’ 속의 클라우제비츠의 태도를 자신의 모방이론으로 설명한다. 지라르가 보기에 클라우제비츠와 나폴레옹은 일종의 ‘짝패’다. 짝패란 서로 적대하면서 모방하는 관계에 있는 둘을 말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에게 매혹된 사람이자 나폴레옹을 증오한 사람이다. “모방적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클라우제비츠는 때로는 나폴레옹이라는 모델에 사로잡히지만 또 때로는 정반대로 나폴레옹을 증오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을 증오하면서 모방하는 사람이 클라우제비츠다.
지라르는 이런 짝패 관계가 모든 전쟁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말한다. 전쟁은 서로 적대하는 짝패의 대결처럼 ‘극단으로 치닫는’ 경향을 지닌다. 전쟁에 관한 이런 인식은 클라우제비츠 자신이 ‘전쟁론’에서 밝힌 것이기도 하다. “교전국들은 모두 상대방을 자신의 법으로 삼는다. 여기서 상호행위가 나오는데, 개념상으로 이 상호행위는 극단에까지 이르게 된다.” 거듭 주목할 것은 지라르가 전쟁을 두 짝패 사이의 ‘결투’로 본다는 사실이다. 교전국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은 그저 명분일 뿐이고, 두 세력 사이에서 벌어지는 짝패 경쟁이야말로 전쟁의 본질이다. 짝패 경쟁은 시기·선망·질투·원한을 동력으로 삼아 한쪽이 끝장날 때까지 계속되기에 ‘극단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것이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밝힌 전쟁의 진실이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는 이 통찰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뒤에 가서 철회하고 말았다. 그 철회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클라우제비츠라는 이름과 거의 동일시되는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명제다. 전쟁이 일종의 정치라는 것은 전쟁 안에 협상과 타협의 요소가 있다는 것인데, 클레우제비츠가 이 명제로 돌아선 것은 당대를 지배하던 계몽 이성의 압박을 받은 결과라고 이 책은 해석한다. 계몽이성에 휘둘리지 않았다면 클라우제비츠는 ‘극단으로 치닫기’라는 자신의 통찰을 밀고 나갔을 것이다. 전쟁은 합리적 인간의 계산적 정치 행위가 아니라 모방적 인간의 가속적 경쟁 행위다. 짝패 관계의 경쟁과 모방의 동역학은 둘의 대결이 끝장을 볼 때까지 계속된다.
지라르는 이 새로운 명제를 전쟁 일반, 특히 1945년 이후 현대 전쟁에 적용한다. 과거의 전쟁에는 중세 시대에 만들어진 전쟁법이 규범적 구실을 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을 어느 정도 제어했다. 전쟁은 군인들의 일이었고 포로의 권리도 존중했다. 그러나 현대 전쟁에서는 그런 전쟁법이 무력화해 ‘극단으로 치닫기’가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벌어진다. 지라르는 말한다. “세계화 시대, 다시 말해 전쟁의 가속화 시대에 접어든 1945년 이래로 모방이 영역을 넓혀가면서 지구를 뒤덮고 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예컨대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중국과 미국 사이의 갈등은 9·11사태 때 우리를 오도하려 했던 ‘문명의 충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오늘날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 사실 점점 더 닮아가는 두 자본주의 사이의 대립이 진짜 문제입니다.”
극단으로 치닫기라는 전쟁의 속성은 제어 없이 그대로 관철될 경우 거의 묵시록적인 파국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지라르는 ‘거리두기’와 ‘물러섬’을 이야기한다. 그런 태도의 모범으로 지라르가 거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이다.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희생 제도를 부정한다. 하지만 희생제도가 사라진 현대 문명이야말로 짝패 경쟁의 극단화로 과거 어느 때보다 자멸할 위험이 큰 문명이다. 시인 횔덜린이 노래한 대로 ‘위험 속에서 구원이 자라나게’ 하려면 예수의 희생에서 볼 수 있는 물러섬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지라르는 말한다. 오늘의 국제관계에 적용할 만한 지침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남초’ 회사 승진 차별 맞선 여성노동자, 변화 끌어냈다
- ‘이재명당’으로 주류 바뀐 민주당…“본선서 ‘친명횡사’ 걱정”
- 남편 육아휴직 안 했더라면…나는 승진할 수 있었을까?
- 전 정권 땐 한 차례도 난리…18번 지역방문 “관권선거 아냐”
- 조국이 건너지 않은 레테의 강 [세상읽기]
- “전현희는 윤희숙 부친 땅 조사…당선 가능성이 공천 목적”
- 민주당 향해 “종북세력 숙주”…‘황교안’ 따라가는 한동훈
- ‘지지층 이반’ 바이든, 가자지구에 구호품 전할 임시항구 만든다
- 공수처, 이종섭 ‘출국용 조사’…“대통령 범인 도피 돕나?”
- KBS “전국노래자랑 위기…김신영 교체 상당수 시청자 원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