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칼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을 위해
의대 대학병원도 각각 셈법 달라 납득할 만한 로드맵 안 보여
잘못된 의료 시스템 모두 피해자… 부디 의사들도 역지사지해달라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다. 줄거리를 떠올려 보자. 멜빈 유달(잭 니콜슨)은 인기 로맨스 소설가지만 그의 일상은 정반대다. 강박장애 환자인 데다 괴팍한 성미로 남이 상처받을 소리만 해댄다. 옆집 사는 화가 사이먼(그레그 키니어)이 동성애자라고 대놓고 조롱하며 그의 개를 쓰레기통에 버리기까지 한다. 멜빈을 상대해주는 건 세상에 단 한 사람, 단골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캐럴(헬렌 헌트)뿐이다.
어느 날 사이먼이 강도에게 두들겨 맞아 입원하면서 멜빈이 사이먼의 개를 돌봐주게 되었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했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전개도 의료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서로를 길동무 삼아 뜻밖의 여정에 오르게 된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문제는 의사들의 반응이다. 나는 의사 여러분의 역량과 선의를 믿는다. 의료 사고 면책 보장 등 의사들의 요구 사항에는 합리적인 부분이 있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역지사지를 못 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우리의 현실도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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