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주경야독 대신 조경야몽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장 2024. 3. 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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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학자 정옥(鄭玉)은 포심(鮑深)이란 인물을 위해 ‘경독당기(耕讀堂記)’를 쓰면서 ‘밭을 갈아 부모를 봉양하고 글을 읽어 몸을 닦으니 마을 사람들 모두 밭가는 데 힘을 다하고 모두 따라 글 읽는 공이 있으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저절로 도타워지고 풍속이 순후해졌다’고 칭찬했다.

은퇴 후 귀농한 지 4년 차. 어려운 문제 가운데 으뜸은 농법(農法)이다. 아침 일찍 해 뜨기 전 밭에 나와 풀과 씨름하는 것이 전원생활의 8할이다. 나머지 2할은 화전식 개간과 씨 뿌리기. 옛날의 주경야독(晝耕夜讀)에서 ‘주경’의 범주에 해당하는 노동은 ‘땅파기-씨뿌리기-풀 뽑기’인데, 그걸 전부 손으로 한다. 나름 고역인 탓에 해 뜨기 전 그날 일을 해치운다. 옛 사람의 ‘주경’이 ‘조경(朝耕)’으로 바뀐 것. 뜨거운 한낮엔 책을 보거나 글을 쓰니 ‘주독(晝讀)’이고, 밤엔 잠을 자야 하니 ‘야몽(夜夢)’이다.

이웃 농부들은 두엄과 비료를 골고루 편 다음 기계로 땅을 깊이 갈고 이랑을 만든다. 제초제를 듬뿍 뿌리고 씨앗을 파종한 뒤 비닐을 씌우거나 비닐을 먼저 씌운 뒤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을 뚫어 모종을 심는다. 그로부터 풀싹 한두개라도 머리를 내밀라치면 깜짝 놀라며 제초제 통을 메고 밭으로 씩씩하게 나간다. 그게 농작물로 수익을 올려야 하는 이곳의 ‘신농법’이다.

반면 ‘구농법’은 일명 ‘화전농법’이다. 옛날처럼 초목을 불태우지는 않고, 뽑아 버린다. 당연히 씨를 파종하거나 모종을 심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전의 풀밭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이 방식으로는 곡식 한 톨, 채소 한 잎 얻기 어렵다. 어설픈 농부는 몸에 익지도 않은 화전농법으로 농사를 망치고도 땅을 해치지 않았기에 당당하다.

이곳에 들어와서 세상 사람들과 달리 구농법을 고집하고 있으니, 이웃들에게 꾸중이나 듣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였던 그 옛날 포심과는 정반대다. 모름지기 전원의 주민으로 함께 살려면 ‘주경’이든 ‘야독’이든 겸허히 배우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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