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 쓴 배터리에서 니켈 추출, 세계 녹색 시장 석권의 첫발이다
‘샌드박스(sandbox)’는 모래를 갖고 여러 사물을 빚어보게 하는 장난감이다. 아이들이 모래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듯, 기술에도 이런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주자는 뜻에서 탄생한 제도가 ‘규제 샌드박스’다. 새로운 기술이 잘 성장하도록 기존 규제로부터 잠시 해방시켜주는 것이다. 영국에서 2016년 시작한 이 제도를 우리나라도 이듬해 도입했다.
기존 기술 문법으로는 극복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 이 제도는 빛을 발한다. ‘탄소중립’이 그렇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현재 나온 탄소 감축 혁신 기술 후보 가운데 절반가량은 2050년까지 시장성을 갖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기술 성숙, 경제성 확보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규제 샌드박스’의 과감하고 폭넓은 적용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올해부터 ‘규제 샌드박스’ 분야에 새롭게 추가된 ‘순환경제’ 분야가 탄소중립 시대의 패권을 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순환경제는 재활용을 우선하는 친환경 경제 시스템을 일컫는다.
국내 순환경제 정책의 핵심은 미래 먹거리인 배터리(이차전지)에 들어가는 희소 금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주요국에서는 폐기물에서 희소 금속을 추출하는 재생원료 사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엄격한 폐기물관리법 때문에 이 시장이 크지 못했다. 전기차 배터리 안에는 리튬, 코발트, 니켈, 망간 같은 값비싼 금속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선 채굴되지 않는 희소 금속이다. 앞으로 전기차 제조에 필요한 광물 공급망의 안정화가 필요한 우리 입장에서 좋은 선택지 중 하나가 다 쓴 배터리에서 금속들을 회수하는 것이다.
EU는 탄소중립 달성의 주요 과제로 ‘순환경제’를 꼽고 2020년부터 촘촘한 실행계획을 세웠다. 2025년부터 EU 가입국에서 이륙하는 모든 비행기는 친환경 항공연료를 쓰도록 의무화해 관련 항공유 시장에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식이다. 우리나라도 지금부터 폐식용유 등 다양한 폐기물을 활용해 재생연료를 생산하는 준비를 해놓지 않으면 해외에서 재생연료를 값비싸게 사들여야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가 순환경제에 투자해 각종 녹색기술을 선점한다면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순환경제 시장은 2030년 기준 4조5000억달러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희소 금속뿐만 아니라 2027년부터 발생량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다 쓴 태양광 패널에서도 알루미늄, 구리, 은 같은 광물을 뽑아낼 수 있다. 각국이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에 투자를 늘리기 시작한 시점이 2020년대 들어서이기 때문에 수명이 20~30년 안팎인 태양광 패널은 2050년쯤이면 전 세계적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기업이 빠르고 안전한 재활용 서비스를 구축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할 수 있다.
정부와 산업계는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적극 활용해 희소 금속 관리 방안을 짜는 한편, 순환경제 분야에 아낌없이 투자해야 한다. 산업계가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더 나아가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정부가 뒷받침해야 한다. 오랫동안 규제 부처로만 알려진 환경부가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운용해 시장 개척에 앞장선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환경 규제로 환경을 지키던 시대를 넘어, 환경산업 활성화로 환경을 지키는 미래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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