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30] 이혼하면 사과해야 하나요

김지원 기자 2024. 3.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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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용서해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최근 한 지자체장은 온라인에 직접 올린 글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중범죄라도 저지른 줄 알았다. 읽어보니 재작년 부인과 이혼 후 새로운 여성과 교제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공직자 재산 등록에서 부인이 빠진 이후 근거 없는 추문이 나돌자 뒤늦게 이혼 사실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혼이 죄도 아닌데, 대체 뭐가 죄송하다는 거지?’ 생각하며 기사 댓글을 클릭했는데, 깜짝 놀랐다. 응원한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의외로 날선 댓글이 많았다. 대개 이런 내용이었다. “가정도 책임 못 지는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이혼이 자랑도 아닌데 자중해라”. 욕설과 비속어를 써서 삭제 조치 된 댓글도 여럿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인에게 ‘정상 가족’은 토익 점수 같다. 정치판에 터를 잡으려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갖춰야 하는 ‘스펙’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유력 주자들에겐 내조에 충실한 아내 혹은 남편과 토끼 같은 자녀가 있다. 그 든든한 배우자와 자식이 훗날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가져다줄 때도 있지만. 어찌 됐든 가정은 그가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적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담보해주는 장치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사회 통념이 바뀌고 있다곤 하지만, 여전히 정치권을 비롯한 주류 사회에서 결혼 제도 밖의 삶은 비정상 혹은 미완성으로 여겨진다. 이혼은 ‘사죄해야 하는 일’이고 새로운 연애나 재혼은 ‘쉬쉬해야 하는 일’ 취급받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비혼 역시 “하자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다. 전직 대통령조차 그의 과오와는 별개로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 루머에 둘러싸이지 않았나.

그러나 결혼 생활을 공적 잣대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최적의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혼이나 재혼 같은 사적인 주제는 능력이나 공약을 검증해야 할 공론장을 손쉽게 점령해버릴 수 있다. 내밀한 사안일수록 자극적인 마타도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 잣대에 유능한 개인이 비정상으로 낙인찍혀 배제될 가능성도 작지 않다. ‘핀처럼 날카로운 여장부’로 불렸던 줄리아 길라드 전 호주 총리는 동거했던 파트너만 4명이었고 재임 시절에는 아이가 셋인 남성 미용사와 함께 살았다. 우리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애 딸린 남자와 동거하는 비혼 여자’라는 자극적인 수식어와 그의 사생활을 파헤치겠다는 유튜브 가짜 뉴스의 홍수에 국회의원조차 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 프랑스인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영부인이 스물네 살 연상에 자기를 가르쳤던 선생님인데,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 친구는 간단하게 답했다. “그게 대통령이 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사적 영역에 속하는 사실로 그의 정치적 능력을 가늠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수십 살 연상을 만나든, 결혼과 이혼을 몇 차례씩 반복하든 그건 개인의 삶이 아닐까. 사생활을 파헤쳐 공적 자격을 판별하는 잣대로 삼는 것을 민주 시민의 권리라고 말할 수 있나. 사생활과 공적인 삶이 완벽하게 분리되기는 어렵겠지만, 사생활만으로 비난하는 유권자와 그 이유만으로 사과하는 정치인은 사라지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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