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트럼프 편 안 든 ‘트럼프 지명 판사’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2024. 3. 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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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코니 배럿(오른쪽) 미 연방대법관이 지난 2020년 10월 26일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열린 대법관 취임식을 마친 뒤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 /EPA 연합뉴스

“대선이라는 불안정한 시기에 (판사들 간) 이견(異見)을 증폭시킬 때가 아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출마 자격을 유지한다는 최근 미 연방대법원 판결문에서 에이미 코니 배럿(52) 대법관은 이렇게 적었다. 배럿 대법관은 4년 전 트럼프가 사전 면접까지 본 뒤 지명했다. 동성애와 낙태를 반대하는 ‘골수 공화당’ 판사다. 그런데도 동료 보수 대법관들이 내린 판단이 트럼프를 과도하게 보호한다는 취지의 보충 의견을 냈다. 트럼프가 앉힌 판사가 트럼프 이익에 반하는 의견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대법원은 대법관 9명 중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판사가 6명인 ‘절대 보수 우위’ 구도다. 그는 이번 판결이 엄밀한 법리 판단을 넘어 정치적 고려가 포함됐다고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연방대법원은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제한한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을 ‘주(州)정부나 주법원 등이 연방 공직(대통령) 출마를 막을 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뒤집었다. 여기까지는 9명 대법관 전원이 찬성했다. 한 발 더 나아가 다수의 보수 법관들은 공직 출마 제한은 연방의회가 만든 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공화당이 하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트럼프 출마를 막는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소수인 진보 대법관 3인방이 이 부분을 두고 “동의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트럼프의 출마 자격 논란이 향후에 다시 불거질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방탄용 판단’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배럿도 의견을 함께했다. “(대법원 역할은) 주정부 등에 출마 제한 권한이 없다는 판단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결정 않겠다”고 했다.

한국만큼 좌우 진영 대립이 심각한 미국 사회의 복잡한 쟁점들을 최종 판단하는 대법원 판결을 보면서 놀랄 때가 적지 않다. 법관들이 ‘이념 밖’ 소신을 밝힐 때가 생각 외로 자주 있기 때문이다. 배럿은 총기 소지 권리의 열렬한 옹호자다. 그러나 작년 총기 부품을 구매할 때 신원 조회를 의무화하는 바이든 행정부 규제에 대한 합헌 판결 당시 진보 법관들 편에 섰다. 이민 문제에도 강경한 입장이지만, 올 초 텍사스주가 국경에 날카로운 철조망을 설치해 부상자가 속출하자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제거하는 데 찬성했다.

미 대법원도 ‘이념 양극화’로 대중의 신뢰를 많이 잃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들 판결이 신선하게 보인 건 한국의 사법부 상황과 대비됐기 때문이다. 전직 대법원장이 정권 코드에 맞는 판사들만 요직에 앉히고, 자신 편에 불리한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은 쫓아내는 모습만 보였다. 진영 논리에 치우치지 않는 판결이란 걸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배럿은 이번 판결문에서 “법원의 글(판결문)은 ‘국가의 온도’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정치가 무르익는 계절일수록 판결은 냉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읽혔다. 한국은 정반대로만 달려왔던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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