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216] 도깨비방망이
기념우표 받아 보고 알았다. 가곡 ‘보리밭’ 가사 제목은 원래 ‘옛 생각’이었음을. 동요 ‘과수원 길’도 그 박화목(1924~2005) 선생이 지었고. ‘서정성 깊은 작품들은 많은 이에게 아련하고 따뜻한 추억을….’ 우표 안내문에서 또 한 가지 새삼 깨쳤다. ‘아련하다’를 ‘기억 따위가 어렴풋하다’ ‘아리송하다’는 말뜻과 달리 쓰는 일이 흔함을(여기서는 ‘그립다’에 가까워 보인다).
두 아이 엄마가 된 옛사랑을 우연히 만났다는 노래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는 더 이상하다. ‘우리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그날의 노래는 우리 귀에 아직 아련한데.’ 본뜻과는 반대인 ‘생생함’을 나타내는 말로 잘못 쓴 것이다. ‘아직’이 그 증거. 본뜻대로 ‘흐릿함’을 나타내려면 ‘이제/벌써/이미 아련한데’ 했겠지.
이렇듯 거꾸로 갔어도 아주 익숙한 쓰임새가 ‘피로 회복’이다. 피로는 ‘몸이나 마음이 지쳐 고단함. 또는 그런 상태’를 말하므로 ‘피로 회복’은 ‘고단한 상태를 되찾음’ 아닌가. 피로를 강조하려거든 ‘피로 해소’, 회복을 내세운다면 ‘기력(원기) 회복’이 옳다. ‘피로한 상태에서 회복’의 핵심어만 추렸다기엔 지나친 생략이고. 아무튼 그 뒤집힌 말뜻으로 오랜 세월 늠름한 음료가 있으니 대단한 일이다.
‘(무라야마가) 총리 시절 도쿄 근교 하코네 여관으로 휴가 간 일화도 유명하다.’ 일화(逸話),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말한다. 한데 그 일화가 유명하다니 모순이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면 유명할 수 없고, 유명하다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까. 이웃 나라 기자가 알 정도면 일화라 하기 어려우므로 ‘휴가 간 이야기(일)도 유명하다’고 표현해야 한다. ‘유명(有名)’도 실은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음’이니 ‘휴가 간 이야기(일)도 널리 알려졌다’ 해야 적확하다.
‘각종 삶의 아련한 모습이 생활의 바탕’ ‘아련한 눈빛의 리트리버가 열연’ ‘아련한 음색과 풍부한 양감으로’…. 무슨 뜻인지 참으로 아련한 말이 매체마다 쏟아진다. ‘아련하다’가 도깨비방망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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