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학출 운동권'에 대한 쓸쓸한 상념
한때 한국에서 자신이 서울대학교 출신이란 사실을 부끄러워한 '운동권'들이 있었다. 극단적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손쉽게 지대추구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젊은이들이 자신의 출신성분을 부정하고 향한 곳은 놀랍게도 인천이나 부천, 안산, 안양 등의 공장지대였다.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노력한 청소년기와 달리 그 청년들이 새롭게 목표로 삼은 것은 자신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공장에서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당시를 회고한 후일담 문학작품을 보면 그들이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대학생 신분을 회복하려 한 얄팍한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앞으로 한평생을 노동자로 살아갈 것을 결심하고 공장으로 향하는 비장함을 품고 있었다.
이른바 '학출'(학생 출신 노동자)로 불린 1970~80년대 운동권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서울대 출신 외에도 많은 젊은이가 대학을 졸업하는 대신 공장으로 향했다. 지금에야 중등교육 졸업자의 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지만 입학정원이 엄격히 통제된 80년대 중반 이전에는 대학생 신분 자체만으로도 사회적으로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보면 그 결단의 어려움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대학생에서 학출로의 전환은 일부 극단적인 운동권의 치기 어린 선택이 아니었다. 학출은 하나의 집단적 투신이자 사회운동이었는데 80년대 중반 한때 1만여명에 이르렀다는 얘기도 있을 만큼 거대한 흐름이었던 것이다('학출' 오하나 저·이매진 출간·2010년). 이들이 밑바탕이 돼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이끌어내고 이후 불모지에 가까웠던 한국의 노동조합 운동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대학생 신분을 버리고 운동권으로서 삶을 이어간 이들이 공장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시빈민으로서 삶을 받아들이고 시민단체나 사회운동단체에 투신한 자도 다수 있었다. 총학생회장 같은 감투를 쓴 이들은 짧은 모색을 거쳐 정치권에 집단적으로 투신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기성 정치권에 편입돼 국회의원 배지를 단 운동권이 그들이다.
물론 대학 시절 운동권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은 자들이 모두 공장이나 시민·사회단체, 정치권에 투신한 것도 아니다. 이들보다 훨씬 많은 운동권이 졸업 후 조용히 취직하고 우리 사회의 평범한 시민이 됐다. 공장과 시민·사회단체로 가거나 정치권으로 간 이들을 넓게 봐 '직업 운동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들이 전체 운동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이다.
직업 운동권에서 중도에 생활전선에 뛰어든 선배들도 존재했다. 90년대 후반 대학에 간 내가 교내에서 목격한 80년대 학번이 그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넓은 의미의 학출이었는데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학교로 돌아온 이유는 도서관에서 사법시험이나 각종 고시, 자격증을 준비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단순히 졸업장을 받기 위해 뒤늦게 학부과정을 다시 이수한 선배도 있지만 대부분 늦은 나이에 일반적인 취업 이외의 길을 모색한 선배였다. 아침 일찍 학교 중앙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책과 씨름하다 점심을 먹고 우유팩 차기나 농구를 하던 모습, 동아리방에 갔을 때 예전 날적이(일기)를 뒤적이는 모습을 종종 접했다. 이들 중 소수는 원하던 자격증을 취득하고 학교를 떠나갔지만 더 많은 이는 불가피하게 자영업자가 돼야만 했고 시간이 갈수록 연락이 되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온 고학번 선배들과 가끔 술자리를 하게 됐을 때 느낀 무상함을 이제는 다 함께 느끼고 있다. 젊은 시절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학출이 된 자들은 어떤 신념과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정치진영에 골고루 섞여 있는, 지리멸렬해 보이는 86세대 운동권들은 치열했던 당시 학출들의 신념과 가치를 보존하거나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양지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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