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부정확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 그리고 관점의 균형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에서는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를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가끔은 이보다 더 정확한 역사의 정의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근래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건국전쟁’이라는 영화가 소위 장안의 화제가 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오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현수막에서는 ‘모든 청소년이 보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을 하고, 6·25 전쟁을 수행하고, 이후에도 한참을 대통령으로 지내면서 많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이외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후 법률가의 기억으로는 헌법에서 배운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김주열 열사 사망사건, 부마사태, 4·19 의거, 이기붕의 국정 농단 등등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좋은 기억이 없다. 나의 기억이 너무 부정확한 걸까. 혹시 경제 개발이라도 했나. 국민이 먹고 살 수 있게 했나. 잘 모르겠다. 나의 부정확한 기억에는 이승만의 ‘공’에 대한 빈틈이 너무 많은가 보다.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도 열광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승만의 ‘공’이라는 것은 독립운동, 그리고 민중이 어떻게 단결하여 주도권을 교체할 수 있는지, 그리고 실제로 교체했다는 긍지와 앞으로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준 것이 가장 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힘이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어 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헌법을 공부하다 보면,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말이 나온다. 자유민주주의에 배치되는 반민주 체제, 독재 체제, 기본권을 억압하는 체제 등을 방어할 수 있어야만 실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수가 있다는 것으로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히틀러가 집권해, 나치 체제로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을 경계하면서 나온 이론이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극우주의와 종교 원리주의가 성행하고, 과거 국가 사회주의의 전체주의 이념 같은 것들이 유행하려 하고 있다. 우리도 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고, 방어적 민주주의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뤄내고, 어느덧 정치나 경제 모두 선진국으로 들어간 나라다.
과거에는 혹시 한 사람의 열 걸음을 통해 힘을 기르고, 경제발전을 하고, 나머지 아홉 사람도 근근이 밥을 먹게 되었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근근이 먹는 밥이 중요하지 않다. 더 큰 밥을 먹기 위해 이제 사고의 자유, 그리고 다양성의 인정,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다양한 사고의 스펙트럼 향연이 필요한 시기다. 즉 모두가 함께 손을 잡고, 최소한 서로를 인정하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려 하고, 다른 사람도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보장해 주어야만 다양한 창조적 사고에서 자율주행과 AI, 양자컴퓨터의 시대, 눈부신 과학발전의 시대, 영화에서만 보던 유토피아 같은 미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죽어라 싸워대고, 남 말은 무조건 틀렸고 자기 말만 맞다고 한다면, 어떻게 혼자서 저 많은 것을 다 하겠는가. 나는 ‘건국전쟁’을 보지 않았고, 노무현, 문재인 영화도 보지 않았지만, 지금의 흐름이 이념의 무책임한 다툼, 그리고 독재의 미화, 극우든 극좌든 자기 말만 옳다는 고집쟁이들의 시끄러운 말 잔치로 사회가 가득 차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만약 누군가 ‘건국전쟁’을 보겠다면, 그 사람이 노무현이나 문재인에 대한 영화도 보았으면 좋겠고, 반대도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더라도, 대한민국이,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좌우 날개의 균형을 갖추고, 합리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갖길 바란다. 매체들의 교묘한 낚싯바늘에 걸리지 않고, 논쟁은 하더라도 서로를 인정하는 이해와 관용의 시대를 만들어가고, 이를 통해 눈부신 미래 시대로 나아가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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