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인생의 고통은 왜 자꾸 반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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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이번엔 상당한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만,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거를 치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 “또 저러네? 4년 전에도 이렇게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일어나더니 원.”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고통은 반복됩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매일 먹고 또 잠을 자지만 지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굶주림과 졸림이 늘 새로 오기 때문이다.”
이 역설적인 표현은 고통의 필요악(必要惡)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행복한 순간이 매일처럼 반복된다 해도 우리가 그 행복을 지겨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행복을 날로 새롭게 해 줄 수 있는 행복의 그림자, 즉 고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깁니다.
긴장과 갈등이 존재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하게 살았다’는 소설이나 연극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참으로 재미없고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겠지요.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And they lived happily ever after)’라는 문구가 마지막에 필연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오기 위해서 백설공주는 생모를 여의고, 쫓겨나고, 독사과를 먹고 코마 상태에 들어가는 등 온갖 신산(辛酸)스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속편이란 전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 완결된 듯한 상황을 뒤집어엎는 위험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이클 콜레오네가 새 두목이 돼 패밀리를 평정시킨 듯한 ‘대부’ 전편의 이야기는 곧 정치권력과 신흥세력의 도전으로 다시 갈등이 생기는 얘기로 이어지고, 악당 두목을 죽이고 스스로 자신의 손에 수갑을 채워 경찰인 동생과 화해하고 가족을 복원하는 ‘영웅본색’ 1편의 줄거리는 2편에서 다시 새로운 위폐 조직이 나타남으로써 정신없이 꼬여버립니다. 게다가 1편에서 죽은 장애인 친구는 미국에서 돌아온 쌍둥이 동생의 모습으로 환생하기까지 합니다.
백설공주 역시 마찬가집니다. 왕자와 결혼한 뒤 동화책의 마지막 문구같은 영속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선 또다시 새로운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시댁 왕족들과의 새로운 관계, 고부간의 갈등, 여러 비빈(妃嬪)들과의 질서유지, 대국민 이미지 확보, 자녀양육, 내조(內助), 새로운 로맨스… 숱한 난관과 긴장들을 거치고 풀어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행복과 불행은 거미줄같은 가능성의 길목들을 지나칠 것입니다.
산봉우리 넘어서면 또다시 오르막길. 징검다리 건넜더니 장강(長江)이 눈 앞에. 주말 푹 쉬었더니 또다시 월요일이 눈 앞에. 스트레이트 톱 마감하고 났더니 20매짜리 르포박스가 고스란히 남아있네. 고통의 날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지만, 그 반대의 명제도 성립합니다.
고통스럽지 않은 날 역시 영원하지 않다. ‘등석자(鄧析子)’에 나오는 말대로, 체통자구불능불호(體痛者口不能不乎). 고통스러우면 자연히 신음소리가 나오게 돼 있는 법. 그러나 또한 청마(靑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괴로움은 괴로와하는 자만의 것이요, 다른 어느 누구의 아랑곳할 것도 못 되는 것인가 봅니다.(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중)’ 골고다 언덕 정도는 돼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나타나는 것이지, 평소에 내 짐을 대신 들어줄 다른 사람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공자는 ‘논어’ 학이(學而)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愼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
(군자, 식무구포, 거무구안, 민어사이신어언,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군자는 먹음에 배부름을 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구하지 않으며, 일을 민첩히 하고 말을 삼가며, 도(道)가 있는 사람을 찾아가 (자신을) 바르게 한다면, ‘호학(好學)’이라 할 만하다.
이 질박한 문장 속에 담겨져 있는 논리는 ‘군자(君子)’, 즉 이상적 지식인이란 마땅히 ‘호학(好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군자호학(君子好學)이란 네 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말과 묘한 대구를 이루는 듯합니다. 그런데 호학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고통이란 그 속에 필연적으로 수반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학(學)이란 왜 하느냐? 배부르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편안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도(道) 있는 사람을 찾아 스스로를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기 위해서 일을 민첩하게 하고 말을 삼간다면 어찌 호화아파트와 전원주택과 주식투자와 재산증식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있겠느냐?
그러나 오래전에 외국 박사학위를 취득해 호학(好學)에 대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이 보였던 몇몇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학(學)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참으로 궁금해집니다. 물론, 그들은 남보다 훨씬 민어사(敏於事)했고 신어언(愼於言)했으므로 지금의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겠지요. 하나, 과연 무엇을 위해서?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에 대해서야, 뭐, 그 도(道)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개인의 생각에 따라서 엄청나게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 것이니 일단 접어두고서라도(요즘엔 좀 뜸합니다만, 길거리에서 소매를 붙잡고 “도에 대해 관심 있으십니까?”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시는 분들에게 전 한번도 속시원한 대답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분들이 말하는 ‘도’가 도대체 뭔지 지금도 잘 알지 못합니다.), 확실한 것은 이 분들이 식필구포(食必求飽) 거필구안(居必求安)하는 데 너무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는 것이고, ‘민어사’하고 ‘신어언’했을법한 그 오랜 세월들이란 온통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내온 나날들이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얘깁니다.
고통스런 나날들이여! 내게 보상을 달라! 다시는 고통 속에 빠지지 않을 부(富)와 명예를 내게 주소서. 나는 비록 고통을 겪었다 해도 내 아들딸들은 두번다시 그런 진흙탕 속에서 헤엄치지 않아도 되게 해 주소서. 고생고생해서 판사 사위 얻었더니 사위랑 웬 여대생이 수상해? 죽어도 그 꼴 못 보지. 애들 불러! 군대 있을 때 한 선임하사는 이런 멋진 비유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총알 피하려다 대포알 맞는 수가 있다.”
오래 전 서예를 하시는 지인 한 분이 이런 일을 겪었답니다. 빈손으로 출발, 자수성가해 큰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이 어느날 사무실에 붙여놓을 휘호 한 폭을 부탁했답니다.
“휘호로 써 주실 말을 이미 생각해 놨습니다. 제가 스스로 사업을 일으켜 스스로 지금과 같은 재산을 모았으니… 이런 말을 써 주시는 게 딱 맞겠습니다. 아주 좋은 말이지요.”
“무슨 말인데요?”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아니 저…”
“왜 그러십니까?”
“자업자득이란 건 그런 말이 아니라…”
“저한테 써주기 싫으셔서 그러는 겁니까?”
네, 그렇지요. 자업자득입니다. 자업자득. 억지로 피할 게 있고, 그렇지 않을 게 있지요. 손에 먼지 묻히지 않고 살려는 건 욕심입니다.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고통으로 생각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경지에 이른다면, 자업자득 같은 일은 당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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