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우리] ‘전쟁억제’ 쇠퇴의 시대

2024. 3. 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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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주변국 잇단 침공에도
美 지난 20년간 무기제공 안 해
우크라전쟁 향방 예의주시하는
北·中에 시사하는 바 작지 않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대만해협, 동중국해 및 남중국해에서 지속되는 중국의 위기 고조 행위 등 한국을 둘러싼 세 국가는 끊임없이 현상변경을 시도하고 있다. 위와 같은 물리적인 현상변경뿐만이 아니라, 외교, 경제,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현상변경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특히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전쟁 초기 미국과 동맹국은 직후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체제 퇴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 영토에 병력과 전략자산 추가 배치, 대규모의 대외군사금융(Foreign Military Financing) 지원, 그리고 우크라이나 안보지원 이니셔티브(Ukraine Security Assistance Initiative) 지원 확대 등 전방위적 지원을 제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침공 의지는 꺾이지 않고 있다.
정구연 강원대 교수·정치외교학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생각해볼 때, ‘과연 21세기에 억지(deterrence)란 작동하는가?’ 생각해볼 수 있다. 억지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상대방이 특정 행동을 했을 때 치러야 할 비용이 이익보다 크다는 점을 각인시켜 행동을 시도조차 못 하게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사례를 생각해본다면,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들의 조치가 의사결정에 의미 있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결론은 2024년의 상황만을 분석해서 도출하지 말아야 한다. 2000년 이후 미·러 관계의 전반을 살펴보아야 한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도 미국은 러시아의 현상변경 행위에 대비하여 의미 있는 억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외교관계 회복을 위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동유럽 미사일 방어계획을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유럽 내 주둔 규모를 줄였다. 당시 유럽 주둔 미국 육군은 3만명 규모로, 냉전기 10%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침공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그 어떤 지원도 제공하지 않았다. 2014년 러시아 정보요원 및 친러 분리주의 조직이 말레이시아 항공기를 격추했을 때도 미국은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방어적 무기 제공이 위기 통제를 어렵게 할 수 있다며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 및 아파치 공격헬기 대신 장갑수송차량, 야간투시경, 의료용품만을 지원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러시아로 하여금 미국의 대러 억지 신뢰도를 의심하게 만들 수 있다. 억지의 중요 요소는 당연히 국가가 보유한 군사력이다. 고통을 줄 수 있는 힘이 협상력이 될 수 있으며 억지의 기반이 될 수 있다. 미국이 전쟁 초기 우크라이나에 치명성 높은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러시아는 오판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푸틴은 러시아 군대가 침공 직후 며칠 안에 키이우로 진격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억지에 관한 지도자의 판단과 일관적인 의지이다.

2000년 이후 미·러 관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러시아로 하여금 미국의 대통령들이 행정부 교체와 관계없이 대러 억지에 대한 의지가 낮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했다. 억지 신뢰도는 일회성 조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관적인 행동에 의해서 판단된다. 그러나 미국은 지난 20년간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는 대러 저항 능력이 없었으며, 러시아는 침공 의지를 굳이 꺾을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갈등이 고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 무기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미국 의회의 양당적 입장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직도 계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지난 20년간의 미·러 관계는 한반도에도 많은 함의를 준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휴전을 공공연히 언급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향후 우크라이나 전쟁에, 그리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을 관찰하는 중국과 북한에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을 것이다. 억지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정구연 강원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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