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유지 서약서까지 썼는데”…K반도체 핵심기술 이렇게 털렸다
AI 반도체의 ‘핵심’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은 지난 달 4세대를 건너뛰고 5세대 HBM3E 양산에 들어갔다고 선언했던 바 있다. 선발주자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단숨에 따라잡으며 업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전직 연구원 A씨 뿐 아니라 국내 반도체 인재들이 마이크론으로 옮겨간 사례가 상당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마이크론이 인력을 영입해 기술을 습득하는 방식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술 속도를 따라잡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7일 법조계와 반도체 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수석부장판사 김상훈)로부터 전직 금지 가처분이 인용된 전직 연구원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메모리연구소 설계팀 주임 연구원, D램 설계개발사업부 설계팀 선임연구원, HBM사업 수석, HBM 디자인부서 프로젝트 설계 총괄 등으로 근무했다.
정보보호서약서와 전직 금지 약정서, 국가핵심기술 비밀유지 서약서까지 썼음에도 A씨는 약정기간에 앞서 마이크론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뒤늦게 파악한 SK하이닉스가 지난해 8월 가처분 신청을 냈다. A씨가 실제 마이크론에 취업한 시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A씨가 해외에 체류중인 만큼, 결정문이 실제 송달되기 전까지는 법적인 효력도 발생하지 않기에 실제 효력 발생까지는 시간이 더 소요될 수 밖에 없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은 격변기로 접어들며 하루가 다르게 시장 판도가 바뀌고 있다. 특히 마이크론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거세게 추격하는 HBM 시장은 이같은 판도 변화가 더 두드러진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적층한 칩이다.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을 비롯한 연산 장치 바로 옆에서 빠른 속도로 정보를 전달해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꼽힌다.
현재 HBM 시장은 SK하이닉스가 절반 가량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며 주도권을 쥐고 있다. 삼성전자도 최근 24기가비트(Gb) D램 칩을 ‘실리콘 관통 전극(TSV)’ 기술로 12단까지 적층해 업계 최대 용량인 36GB HBM3E 12H(High·12단 적층)를 구현하는 데 성공하면서 차세대 HBM 시장의 경쟁도 불이 붙은 상황이다.
이 가운데 글로벌 D램 3위 기업이자 HBM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이 5세대 HBM인 HBM3E를 양산한다고 선언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바짝 추격하고 나선 것이다.
특히 마이크론은 자사의 HBM3E 제품이 올해 2분기 출하를 시작하는 엔비디아의 새로운 칩 H200 GPU에 사용될 것이라고 밝히면서 업계를 긴장시켰다. 마이크론의 HBM3E 양산 시점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보다 앞선 것은 물론, AI 반도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가 고객사라는 사실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특히 마이크론은 미국 기업이라는 점에서 국내 기업들에게는 더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기대할 수 있고, 미국 기업들 사이에 퍼지는 ‘자국 기업 선호’ 분위기의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D램 시장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들의 ‘텃밭’으로 분류돼 왔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작년 4분기 D램 시장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45.7%, SK하이닉스가 31.7%, 마이크론이 19.1%로 집계됐다. 아직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존재감이 굳건하지만, AI 반도체 경쟁이 격화되면서 시장 판도 또한 빠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마이크론의 급부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사건 심리에만 8개월이 걸린 데다 A씨가 해외에 있어서 결정문을 송달하지 못해 법적 효력도 없는 상황이라 답답하다”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술유출 범죄나 약정·의무 위반에 대해서는 강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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