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기록의 기억] (113)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草芝鎭)은 바다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해안 진지다. 초지진은 주변 평지보다 조금 높게 평평한 요새로 조성되었는데, 이것을 돈대(墩臺)라 부른다. 초지진은 원래 안산의 초지량(현재의 초지동)에 있던 것을 옮겨오면서 이름까지 따라온 것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처음 구축했고, 1679년 숙종 때 성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1971년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
강화는 한강 입구이므로, 강화가 뚫리면 한양을 막을 수 없어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강화 초지진은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고종 때가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해병대가 이곳을 점령했고, 1875년 일본의 운요호에 의해 파괴되었다. 운요호와의 교전은 다음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귀착되었고, ‘문호 개방’으로 초지진은 할 일이 없어져 파괴된 상태 그대로 방치되었다.
사진은 초지진의 출입문 쪽이다. 1971년 사진은 파괴된 후 돌보지 않아 허물어진 모습인데, 성벽 일부와 돈대 터만 보인다. 1973년 보수 공사를 했지만, 조선시대 때의 원래 규모를 복원하지 못하고 돈대 일부만 살렸을 뿐이다. 2024년 사진은 그 복원된 돈대 중 출입구 쪽만을 보여준다.
초지진의 교훈으로 많은 이들이 부국강병의 필요성, 죽음을 불사한 조선 병사들의 의기를 말한다. 하지만 초지진은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에 의해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보여줄 뿐이다. 신미양요 때 미 해병대의 점령을 묘사한 미군 측 기록이다.
“미군은 3명 전사에 부상 10명, 조선군은 전사 243명에 포로 20명. (…) 흰옷의 조선군 시체들이 널려 있는 모습이 처참하다. (…) 바다에 100여 시신이 떠 있고 진홍색 핏줄기가 그어졌다. 조선의 애국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군사력의 강화로 과거의 패배를 미래의 승리로 바꿀 수는 있다. 하지만 전쟁의 세계에 영원한 승리는 없다. 서로 쌓아올리는 무기의 탑 앞에 모두는 패배자다. 칸트는 일찍이 각국이 군사적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형성되는 세계공화국을 꿈꿨다. 영구적 평화는 자본과 국가를 지양하는 지구적 연합체(global association)의 형성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누구는 몽상이라 얘기하겠지만, 인간은 항상 꿈을 실현해 온 존재 아닌가? 초지진을 보며 오늘도 꿈을 꾼다.
김찬휘 녹색정의당 공동대표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대통령실 “김 여사, 다음 순방 동행 않기로”…이후 동행 여부는 그때 가서 결정
- 명태균 “청와대 가면 뒈진다고 했다”…김건희에게 대통령실 이전 조언 정황
- 김예지, 활동 중단 원인은 쏟아진 ‘악플’ 때문이었다
- 유승민 “역시 ‘상남자’···사과·쇄신 기대했는데 ‘자기 여자’ 비호 바빴다”
- [제주 어선침몰]생존자 “그물 들어올리다 배가 순식간에 넘어갔다”
- [트럼프 2기] 한국의 ‘4B’ 운동이 뭐기에···트럼프 당선 이후 미국서 관심 급증
- ‘프로포폴 불법 투여’ 강남 병원장 검찰 송치···아내도 ‘중독 사망’
- 서울대 외벽 탄 ‘장발장’···그는 12년간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 주말 서울 도심 대규모 집회…“교통정보 미리 확인하세요”
- 조훈현·이창호도 나섰지만···‘세계 유일’ 바둑학과 폐지 수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