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사라지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
윤석열 대통령은 ‘평화’라는 말을 쓰는 데 인색하다. 3·1절 기념사에서는 네 번 썼다. 주로 ‘세계 평화와 번영’을 말할 때였다. 반대로,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평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것을 써야 할 때는 ‘힘에 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지 않으면 유약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현 정부 들어 곳곳에서 평화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이 이해된다.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는 2022년 9월 ‘평화실’이라는 회의실 명칭을 6·25 당시 미8군사령관 이름을 따서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강원평화교육원은 지난해 4월 강원도교육청 통일교육원으로 개명했다.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도 그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조태열 외교부 장관은 7일 윤 대통령에게 한반도평화교섭본부를 외교전략정보본부로 바꾸는 조직개편안을 보고했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 기능은 한반도외교정책국(가칭)으로 축소하고, 새 외교전략정보본부 안에 1·2차관 산하에 있던 국제안보국·외교정보기획관·외교전략기획관 등을 함께 두는 방안이다. 이로써 한반도평화교섭본부는 18년 만에 사라지게 됐다.
한반도평화교섭본부는 2005년 6자회담의 9·19 합의를 계기로 이듬해 4월 천영우 초대 본부장이 취임하며 출범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체제 관련 정책을 마련하고, 북한을 비롯한 관련국들과 교섭하는 기능을 맡아왔다. 외교부는 최근 몇년 사이 북핵 협상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업무 효율을 위한 구조조정 차원이라고 했다. 그 배경에는 경색된 남북관계, 현 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기조, 윤 대통령의 평화관이 있을 것이다.
북한과의 핵협상이 열릴지, 열린다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다. 변화된 사정에 맞게 정부조직 개편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강대국들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방안을 내고 교섭하는 일의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북한이 하지 않겠다고 해서 통일, 비핵화에 이어 평화라는 지향점까지 약화시킨다면 정부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우선해야 할 목표가 한반도 평화와 비핵화라는 점조차 얘기하기 어려워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아 개탄스럽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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