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쏘아올린 반도체 3차 대전… K반도체의 운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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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전선(戰線)에 불이 붙고 있다. 미국 인텔은 대만 TSMC가 장악한 첨단 반도체 위탁 생산(파운드리) 시장에 본격 진출하겠다고 지난달 21일 ‘선전포고’했다. 일본의 구마모토 양배추 밭에는 대만 TSMC 신(新)공장이 들어서며 일본의 반도체 왕좌 재탈환 꿈이 커진다.
인공지능(AI) 혁명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자 최근 주요국 매체 머리기사를 뒤덮는 단어가 ‘반도체’가 됐다. 1980년대 미·일 반도체 1차 전쟁,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한·일과 독일, 대만 등이 ‘치킨 게임’을 벌인 반도체 2차 전쟁에 이어 반도체 3차 대전 포성이 요란하다는 평가다.
반도체 격랑이 이는 이때 WEEKLY BIZ는 반도체 관련 필독서가 된 ‘칩워(Chip War·반도체 전쟁)’의 저자인 크리스 밀러(Miller) 미 터프츠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그는 “AI 시대엔 더 많은 컴퓨팅 성능이 필요하고, 결국 첨단 칩(반도체) 없이는 AI도 없다”고 했다. 한국도 AI 반도체 성장에 따라 혜택을 입을 것이란 낙관적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밀러 교수와 함께 반도체 대국(大局) 관전 포인트를 짚었다.
◇관전 포인트①: AI가 쏘아 올린 반도체 대전
밀러 교수는 사실 역사학자다. 하버드대에서 역사를 전공한 뒤 예일대에서 역사학 석·박사 학위를 땄다. 러시아 역사를 파다가 미·소 냉전 시대에 미국이 정밀 타격용 미사일 개발에 성공하며 소련과 벌인 군비 경쟁에서 승리한 요인이 결국 ‘반도체’란 점을 주목했다. 반도체 관련 필독서이자 파이낸셜타임스(FT)가 꼽은 올해의 경영 서적 ‘칩워’가 탄생한 배경이다. 그는 ‘칩워’에서 반도체를 국가 간 패권 경쟁의 핵심 요소로 꼽는다. 그리고 폭발적 성장을 이어가는 AI 시대를 맞아 반도체의 역할은 더 커지고, 이를 둘러싼 경쟁은 더 격해질 것이란 게 밀러 교수 전망이다.
-반도체는 ‘첨단 산업의 쌀’이라 할 정도로 핵심 부품이다. AI 시대에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은.
“칩(반도체)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지난 10년 동안 AI의 발전은 대부분 더 나은 반도체 개발이 이끌었다. AI 기업들에게 고도의 ‘컴퓨팅 성능(Computing Power)’이 필수가 됐다.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챗GPT로 유명한 오픈AI의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AI 반도체 생산 시설 구축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샘 올트먼은 AI 반도체 생산을 위한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자금 최대 7조달러(약 9000조원) 조달을 추진하고 있다. ‘AI 반도체 왕국 건설’에 나섰다는 평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메타 등도 AI 반도체 개발에 뛰어드는 양상이다.
◇관전 포인트②: ‘엔비디아 천하’는 언제까지
AI 반도체를 얘기하면서 빠질 수 없는 기업이 엔비디아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질투의 여신 ‘인비디아’에서 이름을 땄다는 이 회사는 젠슨 황이 동료들과 1993년 만들었다. 게임을 좋아한 창업자들은 틈새시장이던 그래픽 처리 장치(GPU)에 집중했고, AI 열풍이 시작되며 GPU는 잭팟을 터뜨렸다. GPU가 AI를 학습시키는 데 적합한 반도체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GPU를 찾으며 엔비디아의 작년 4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65% 늘어난 221억달러를 기록했다. 엔비디아의 직원 절반이 연봉 3억원 이상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회사명처럼 누구나 질투하는 기업에 오른 셈이다. 업계에선 엔비디아가 쌓아온 AI 반도체 시장 독점 체제가 당분간은 유효할 것으로도 관측한다.
-엔비디아 천하에 도전장을 내밀 곳은.
“엔비디아에 도전하려는 경쟁자는 많다. AMD와 인텔은 엔비디아와 동등한 성능을 지닌 GPU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업체들이 엔비디아와 경쟁하는 데 필요한 ‘소프트웨어 생태계’ 개발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엔비디아가 개발한 소프트웨어 ‘쿠다’는 AI 개발자들이 이미 널리 쓰고 있다고 한다.) 엔비디아의 또 다른 도전자는 구글, 아마존, MS와 같은 클라우딩 컴퓨팅 회사다. 이들은 앞으로도 엔비디아의 GPU를 대량 구매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체 개발해) 엔비디아 의존을 벗어나려 할 것이다. 중국 시장에선 화웨이가 자체 AI 반도체 생산을 늘리려고 하는데, 아직 엔비디아 반도체보다는 못한 것으로 본다.”
-엔비디아의 독주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나는 당분간(some time)은 엔비디아가 AI 반도체의 최대 생산 업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기업의 반도체 수출 제한이 걸린 중국 AI 시장을 제외하면, 나머지 글로벌 시장에서 반도체 업체들은 첨단 AI 반도체 시장에 진입하느라 애먹을 것이다. 하지만 AI 반도체 시장을 ‘공급망 차원’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AI 반도체로 인한 수혜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반도체 제조 업체뿐 아니라 반도체 장비 제조 업체, 화학물질 생산 업체 등 공급망 안에는 다양한 업체가 포함된다. 그래서 이 기업들도 AI 반도체 수요 증가에 따른 과실을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한다.”
◇관전 포인트③: 일본의 ‘반도체 르네상스’ 열리나
지난달 24일 일본 구마모토현에선 세계 최대 반도체 회사 TSMC가 86억달러를 투자해 신설한 반도체 공장 개소식이 열렸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는 이 자리에서 “TSMC 일본 공장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르네상스를 시작하는 지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1980년대 세계 최강 반도체 국가였던 일본이 ‘반도체 왕국’으로 부활하기를 꿈꾼다는 현지 보도도 잇따른다.
-일본 반도체 기술은 경쟁국에 비해 뒤처져 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의 반도체 기술 경쟁력을 무시할 순 없다. 일본 기업이 첨단 반도체 완성품을 생산하지는 못하더라도, 일본 기업의 반도체 장비나 소재가 없으면 이러한 반도체를 아예 만들 수 없다. 일본 기업들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계속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일본 정부의 반도체 육성 노력도 상당한 것 같다.
“그렇다. 일본 정부는 중국이 지역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점과 함께 반도체에 대한 투자가 경제 부흥의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보고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구마모토에 세운 TSMC 제1 공장과 착공 예정인 제2 공장에 보조금 1조2000억엔을 지급하기로 했다.) 일본은 TSMC와 마이크론을 비롯한 외국 반도체 제조 업체의 신규 투자를 지원하고 있다. 또 일본 땅에서도 첨단 반도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일본의 신흥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설립하는 데에도 도움을 줬다.”
◇관전 포인트④: 반도체 ‘미·중 갈등’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나란히 1, 2위를 다투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 중심에도 반도체가 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이 네덜란드 ASML의 첨단 반도체 장비를 군사 목적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수출 제한을 요구하고 있다. 이 여파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 발전의 한계에 부닥칠 것이라는 것이 지배적 전망이다. 밀러 교수는 과거 미국과의 군비, 우주 기술 경쟁이 소련의 경제를 한계로 몰아넣었던 것처럼 중국의 비효율적 반도체 자립 시도가 중국 경제를 어렵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반도체 미·중 갈등은 과거 미국과 소련의 군사 경쟁을 떠올리게 한다.
“중국은 소련과 달리 거대한 내수 시장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소련과 비슷한 길을 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은 당장 반도체 산업에 대규모로 투자해 한국과 대만, 미국 반도체 기업의 역할을 대체하고 싶어 한다.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면서 (과잉 생산 등으로 인한) 비효율이 발생하는데, 이러한 문제를 막대한 국가 보조금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에 대한 권력 집중화가 되레 (효율적인 투자를 막고) 비효율 문제를 낳는 측면이 있다. 중국의 ‘반도체 자력 갱생’ 정책은 이미 너무나 비싼 정책이 되었는데, 앞으로도 점점 더 많은 비용을 투입해야 할 수 있다”
-미국의 장비 수출 제한 조치로 중국은 반도체 산업을 자체 발전시키려 애쓰고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崛起)에 대한 평가는.
“중국이 첨단 반도체를 따라잡기 위해 애쓰는 것은 맞는다. 중국은 덜 발전한(less-advanced) 프로세서 칩을 대량생산하는 데엔 성공할 것이다. 문제는 AI 등에 쓰이는 하이엔드(high-end) 반도체 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중국이 (데이터를 저장하는) 낸드플래시 메모리 칩 생산량을 늘릴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칩 회사들을 (생산이나 가격 면에서) 압박할 수는 있다. 그러나 AI 등에 심을 최첨단 프로세서 칩은 중국이 여전히 상당한 기술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본다. 중국 기업들은 반도체 초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독점하는 ASML 장비를 (미국 제재로) 구매하지 못한다. 그래서 최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이 업계 리더에 비해 비효율적일 것이다. 중국 시장에서야 (최첨단 노광 장비를 못 하더라도) 중국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을 높일 것이 분명하지만, 최첨단 기술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관전 포인트⑤: K반도체의 운명
총성 없는 ‘반도체 전쟁’이 치열한 가운데, 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고심도 깊어지는 양상이다. 지난달 29일엔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경영자(CEO)가 윤석열 대통령을 만나 “삼성이 파운드리 거대 기업으로 글로벌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이 삼성과 협력하는 데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테크 기업과 반도체 제조 기업들의 합종연횡이 펼쳐지는 가운데 한국의 선택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뜻이다.
-TSMC는 최근 AI 반도체 생산으로 뉴스에 자주 나온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 같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AI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삼성과 인텔도 AI 반도체를 생산하지만, TSMC가 AI 반도체의 주요 제조 업체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AI 관련 하드웨어에 대한 수요 급증은 (TSMC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AI 반도체에 필수적인 고대역 폭 메모리(HBM)는 대부분 한국 기업에서 생산한다. (D램을 여러 겹 쌓은 HBM은 동시에 대량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어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HBM 시장에서 업계를 선도(두 기업의 HBM 세계시장 점유율은 90%가량)하는 기업이다. 인텔이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강화하는 것은 한국 반도체 기업이 신경을 써야 할 뉴스이지만, 더 무서운 경쟁자는 TSMC다. 마이크론은 삼성이나 SK하이닉스에 비해 덩치가 작은 회사라 큰 위협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근본적 질문이 있다. 반도체 산업이 AI 산업 발전에 과연 중요한가. 영국의 반도체 설계 업체 ARM은 이 회사 지분 90%를 가진 일본 투자사 소프트뱅크의 시가총액을 넘기도 했는데.
“AI 시스템을 구축하고 배포하려면 반도체가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다. 아마존, 구글, MS 등 전 세계 대형 클라우드 컴퓨팅 기업들이 엔비디아를 비롯한 여러 기업에서 수백억 달러 규모의 칩을 구매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키포인트는 AI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경제적으로 유익하냐는 것이다. AI가 기업의 신제품 판매와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된다면 기업들은 AI에 계속 투자할 것이고, 이에 따라 하이엔드 반도체 칩이 계속 엄청나게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본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떠오를 반도체 다크호스를 꼽자면.
“AI 서비스를 제공하는 빅테크 가운데 일부는 주요 반도체 업체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구글은 이미 지난해 약 30억달러를 들여 자체 AI 반도체 100만개를 생산했다. MS도 지난해 11월 AI 반도체인 ‘마이아100′과 ‘코발트100′을 공개했다. 페이스북을 운영하는 메타도 오는 5월 AI 반도체를 출시할 예정이다.) 특히 구글이 내놓은 AI 작업에 특화된 반도체인 ‘텐서 프로세싱 유닛(TPU)’은 AI 반도체 생태계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마존과 MS도 앞으로 컴퓨팅 분야에서 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 밀러 교수
반도체를 둘러싼 전 세계 주요국의 치열한 경쟁을 다룬 책 ‘칩워(chip war)’의 저자. 미국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에서 국제관계사를 가르치고 있다.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예일대에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브루킹스 연구소, 카네기 모스크바 센터 등에서도 연구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다. 칩워 이전에는 러시아의 경제와 외교정책과 관련된 책을 세 권 저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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