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치형의 과학 언저리] ‘입틀막’, 예산보다 깊은 상처
전치형 |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주간
2월16일 카이스트 졸업식 사태를 보도한 사진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졸업생 신민기씨를 제압하는 대통령 경호원의 굳센 팔뚝과 손이었다. 단호하게 뻗은 그의 팔뚝에는 국가 원수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더 놀라웠던 것은 잔뜩 힘을 준 그 손이 향한 곳이 신민기씨의 몸통이나 팔이 아니라 입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통령의 신체가 다치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싫어할 발언을 막으려는 팔뚝, ‘그 입 다물라’는 손이었다.
경호원의 굳센 팔과 손이 ‘연구개발 예산을 복원하라’는 주장을 틀어막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니다.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 방침이 잘못됐다는 불만은 지난해부터 여러 곳에서 터져 나왔고, 신민기씨의 입을 막는다고 해서 그러한 목소리가 공론장에서 사라질 리도 없다. 카이스트 졸업식 이후에 연구개발 예산 삭감의 영향을 받는 연구 현장의 소식이 계속 보도되고 있고 신민기씨도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경호원의 손이 틀어막은 것은 신민기씨의 구체적 주장이 아니라 한 과학도의 자유로운 정신 자체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학도에게 자유란 대통령이 기회 있을 때마다 힘주어 설파했던 ‘자유’와 다르지 않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남과 다른 생각을 말할 자유, 자연과 사회를 통틀어 지금과 다른 세상을 꿈꾸고 발견하고 실험할 자유이며, 따라서 권력자의 눈에는 반항으로 보일 수도 있는 생각과 행동을 할 자유다. 노벨상 수상자의 발표에도 틀린 것이 있다면 학생이든 누구든 손을 들어 질문하고 오류를 지적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오랜 자부심이다.
카이스트가 학교의 핵심 가치로 삼아 그토록 함양하고 싶어 하는 ‘창의’와 ‘도전’의 정신도 마찬가지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과학자는 기존의 생각, 특히 이른바 석학과 권위자와 권력자의 생각에 도전하며 새로운 무엇을 싹틔우려는 의지, 그것을 테스트하기 위해 번쩍 손을 들고 질문하는 용기, 이후 토론과 검증을 통해 더 나은 지식, 해법, 세상을 찾아나가는 끈기를 통해 성장한다. ‘코리아’의 K를 ‘퀘스천’(질문)의 Q로 바꾸어 ‘QAIST’라는 표어를 만들 정도로 과감하게 “질문하는 인재”를 키우려 했던 카이스트의 정신은 경호원의 굵은 팔뚝에 무참히 짓눌리고 말았다. 팔뚝의 메시지는 “질문하는 인재”가 되려면 입이 틀어막힐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질문을 하더라도 따지는 질문은 삼가고 ‘교수님,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혹시 한번 더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같은 유순한 질문만 하라는 것이다.
‘주어진 문제를 주어진 조건 내에서 잘 푸는 것’. 이것은 과학이 단단한 토대를 구축하며 꾸준히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 더욱 중요했던 것은 주어진 문제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고 문제 자체를 의심하는 태도, 문제를 재정의하거나 없던 문제를 새로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창의와 도전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괜히 문제를 만들려 하지 말고 주어진 문제, 위에서 던져주는 문제나 잘 풀라는 훈계, 내려주는 연구비에 토 달지 말고 빨리 풀기나 하라는 압력은 이 모든 창의와 도전의 정신을 억누른다. 경호원의 굳센 팔뚝과 손은 그 압력의 물리적 실현이었다.
졸업생들을 축하하러 왔다가 연단의 지도자와 다른 생각을 말하려다 들려 나가는 과학도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제 과학자가 되려는 자녀나 친구에게 입조심하라는 당부를 할 것이다. 입이 틀어막힌 채 졸업하는 선배를 본 카이스트 학생들은 이제 권위자 앞에서 ‘당신의 알고리즘은 틀렸습니다. 저의 데이터와 분석에 따르면…’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또 총장, 학장, 학과장, 연구소장, 연구과제 책임자, 지도교수 앞에서 ‘우리는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때 그 입이 틀어막힐까 봐 주저할 것이다.
과학도들이 자유로운 정신에 상처를 입은 채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다음 학생들은 그 정신이 위축된 채로 카이스트에 입학한다면, 이제 카이스트는 어떤 대학이 될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어도 어디선가 굳센 팔이 뻗어올 것이 두려워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과학도들이 늘어날 때 한국 과학은 어떻게 될까. 올해 카이스트 졸업식 사태가 한국 과학에 남긴 심리적 상처는 연구개발 예산 삭감액보다 더 크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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