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은 좌파운동이 아닙니다, 인구감소 대책입니다
이재성│논설위원
시계가 거꾸로 가는 퇴행의 시대에는 대체로 모든 것이 줄어들고 작아진다. 표현의 자유와 더불어 사람들의 꿈도, 공동체가 품는 비전의 그릇도 축소된다. 지키고 싶은 것이 많은 보수와 기득권의 욕망이 먹구름처럼 태양을 가려 변화의 씨앗이 숨 쉴 에너지가 희박해지는 탓이다.
태산명동서일필에 그친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새해 벽두부터 윤석열 대통령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호령과 함께 호기롭게 시작했던 투자 환경 개선 작업은 정부의 구체 방안이 나오자 냉소와 체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주주 가치를 높이겠다면서 지배주주의 전횡을 막을 수 있는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지나치게 낙관적이거나 둔감한 것이다. 윤 대통령은 소액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 개정을 자신 있게 공표했다가 법무부를 내세워 슬그머니 거둬들였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일감 몰아주기 등 사익편취 행위로 법인을 검찰에 고발할 때 총수 일가도 함께 고발하는 내용의 지침을 행정예고까지 했다가 스스로 철회했다. 1400만 주식 투자자라는 거대한 표밭에 욕심이 나서, 공매도 금지와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방침 등을 마구 던졌는데, 정작 고지를 앞에 두고 말 머리를 돌리는 회군을 거듭하고 있다. 일련의 퇴각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단 하나, 총수 또는 오너로 불리는 대기업 지배주주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설령 선거 전략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된 밸류업 프로그램이 나와주길 기대했던 건, 기업 개혁이 경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운명과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주 언론이 일제히 다룬 고영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부원장의 ‘더 많은 대기업 일자리가 필요하다’ 보고서는 이와 관련해 중대한 시사점을 준다. 우리나라는 250인 이상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작은 나라여서, 대기업 일자리로 대변되는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 대학입시 과열과 출산율 하락 등의 사회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대기업 일자리 증가가 입시경쟁 완화와 인구감소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보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실은 한국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피그스’(PIGS: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라는 멸칭으로 놀림받았던 남유럽 나라들보다도 낮다는 점이다. 주요 32개국 가운데 한국이 32위, 그리스가 31위다. 2021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1조8110억달러로 2149억달러의 그리스보다 8배나 큰데, 대기업 일자리 비중은 오히려 그리스가 더 높다. 경제 규모가 같다고 가정하면, 그리스의 대기업 수가 한국보다 8배 이상 많은 것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소수 재벌 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을 빼놓고 설명하기 어렵다.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재벌들은 부당 내부거래와 문어발식 경영, 중소기업 기술 탈취 등을 통해 압도적인 독과점 구조를 완성했다. 새로운 기업은 시장 진입 자체가 어렵다. 이와 관련해 우리 경제가 역동성을 잃게 된 원인이 재벌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에 있다고 분석하는 조덕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의 연구(‘기업집단을 중심으로 한 우리 경제의 자원배분 효율성 하락’)를 참고할 만하다. 대기업에 납품하던 중소기업이 거래가 끊긴 뒤 사정을 알아봤더니 그 대기업 계열사가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대신 납품을 하고 있고, 심지어 수출까지 하고 있는 사례가 여전히 비일비재하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기회 자체를 빼앗는 것이다.
이런 반칙을 막자는 게 지금은 사어처럼 사라진 재벌개혁이고 경제민주화였다. 그런데 한국 사회 주류는 자본주의다운 자본주의를 해보자는 재벌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무슨 좌파 이념운동처럼 백안시했고, 그 결과가 코스피 기업 평균 피비알(PBR·주가순자산비율) 1이 채 안 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인 것이다. 재벌 총수 지배체제 자체가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데, 상속세가 높아 “가업 승계”가 어렵다는 반자본주의적 주장이 대통령 입을 통해 버젓이 생중계되는 게 우리 현실이다.
퇴행의 시대에 필요한 일은 성찰과 준비다. 재벌개혁에 가해진 부당한 이념 공격을 걷어내고, 실용주의 관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배구조 개선을 포함한 재벌개혁은 좌파운동이 아니라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길이며, 입시경쟁과 출산율 하락을 완화하는 방안이다.
san@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전 정권 땐 한 차례도 난리…18번 지역방문 “관권선거 아냐”
- “전현희는 윤희숙 부친 땅 조사…당선 가능성이 공천 목적”
- 민주당 향해 “종북세력 숙주”…‘황교안’ 따라가는 한동훈
- 공수처, 이종섭 ‘출국용 조사’…“대통령 범인 도피 돕나?”
- KBS “전국노래자랑 위기…김신영 교체 상당수 시청자 원해”
- [단독] “이토 히로부미는 인재” “5·18 북한 개입”…국힘 공천자들
- ‘사직 전 자료삭제’ 병원업무 방해 글 올린 의사 압수수색
- 박광온 ‘소수점 낙천’ 시킨 비명계 낙인 효과
- 심금 울린 ‘어느 은퇴 선수의 글’…당신은 최고의 골키퍼
- 코끼리 장례, 내 새끼 얼굴이 하늘 보도록…“이런 매장은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