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폄훼·왜곡 주장 "모조리 근거없어" - 조사위보고서

정다움 2024. 3. 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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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개입·군용폭탄 탈취·오인사격 유도, 모두 '가짜'
'시민군, 무기고 피습 시점' 이견으로 결론 못내
5월 18일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 (PG) [홍소영 제작] 사진합성·일러스트

(광주=연합뉴스) 천정인 정다움 기자 = 5·18 민주화운동을 끊임없이 부정하는 왜곡 세력의 터무니 없는 얘기들이 근거 없는 주장이었다는 점이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로 확인됐다.

이미 거짓으로 밝혀진 북한군 개입설을 제외하더라도 여기에서 파생되거나 이어지는 왜곡 주장 역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시위대가 무장한 사실을 내세우며 계엄군의 발포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왜곡 주장도 시위대 무장 시점 이전 발포가 있던 것으로 규명돼 정당성을 잃었다.

다만, 시위대의 무장 시점을 두고는 조사위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면서 향후 풀어나가야 할 숙제로 남게 됐다.

계엄군 M16 탄환이 시민군 총알로 둔갑, 검시조서 오류

5·18 당시 숨진 민간인 상당수가 무장한 시민군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왜곡 세력은 시민군이 사용한 카빈총에 26명이 숨졌다는 당시 광주지검 검시조서를 근거로 들고 있지만 검시조서 기록 자체가 잘못된 것으로 드러났다.

법의학 자문단을 꾸려 재검증한 결과 카빈 사망자 26명 중 25명이 계엄군의 M16 소총에 숨졌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기존 검시조서는 시신의 총탄 사입구와 사출구의 크기만으로 M16 사망인지, 카빈 사망인지 특정했는데 법의학적으로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는 지적이다.

실제 계엄군의 총격 사망이 명백하거나 시민군이 무장하지 않은 시점(5월 21일 이전)에 사망한 희생자도 카빈에 의한 사망으로 기록됐다.

최초 M16으로 기록됐다가 나중에 수정된 사례도 다수 확인됐다.

'5월의 꼬마'로 잘 알려진 조천호 씨가 무심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영정사진 속 부친 조사천 씨도 이번 조사로 카빈이 아닌 M16 사망자로 재분류됐다.

그의 유품 속 총알 파편이 M16에 사용하는 총알 탄피가 맞는다는 국방부 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가 유력한 증거로 제시됐다.

조사위는 "검시조서 오류는 당시 부검 체계의 한계나 제한적인 사회 분위기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전남대병원 응급환자 기록지가 유일한 사망 기록인 김광복 씨의 경우에만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민의 총에 총상을 입었다'고 기재돼 카빈 사망이 맞는 것으로 판단했다.

계엄군과 대치하는 시민들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계엄군간 오인사격, 시민군 유도 주장도 가짜

5·18 항쟁 기간 군 사망자는 모두 23명(자체 사고 1명 포함)으로, 이 가운데 13명은 광주 외곽 봉쇄 작전에 투입된 계엄군이 서로 오인사격 하면서 목숨을 잃었다.

이를 두고 왜곡 세력은 시민군이 게릴라식 전술로 오인 사격을 유도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과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조사 결과 5월 24일 송암동 오인사격은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시작됐다.

당시 시위대는 광주-나주 길목인 송암동에 배치된 계엄군(보병학교 교도대대)을 경계하기 위해 효천삼거리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던 11공수여단이 이들을 발견하고 총격했다.

혼비백산한 시위대는 민가로 피신하기 급급했고 나중에 군부대 수색에서 체포돼 회수된 총기에서도 사격 사실은 없었다는 점이 확인됐다.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11공수여단은 곧이어 교도대대가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들이받으며 총격을 이어갔고, 여기에 교도대대가 대응 사격을 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같은 날 다른 지점(광주나들목 일대)에서도 매복 중이던 기갑학교 교도대가 부대로 복귀하던 31사단 병력을 시위대로 착각하고 총격해 사병 3명이 숨진 것도 시위대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군 당국은 당시에도 이러한 사실을 숨긴 채 '폭도'들의 습격을 받은 것이라는 가짜 뉴스를 퍼트렸다.

대열을 갖춰 이동하는 무장 계엄군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TNT 폭탄으로 중무장?…작동 안 되는 산업용 폭발물만

무기고·화약고를 습격한 북한 특수군이 대량의 무기·TNT 폭탄으로 무장했다는 왜곡 세력의 주장도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우선 시위대는 군용 폭탄인 TNT를 훔친 사실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시위대는 도청 앞 집단 발포일인 21일 전남 화순탄광에서 산업용 다이너마이트 295.5㎏(13상자), 도화선 6천m(6상자)를 탈취했는데 이를 군 당국이 유사 용도인 TNT로 기록했다가 1997년 검찰 수사까지 그대로 인용됐다.

산업용 다이너마이트와 군 표준 폭약인 TNT는 성분과 외부 형상이 전혀 다른 폭발물인데도 TNT로 오인되면서 시위대의 무장이 위협적인 것으로 비친 계기가 됐다.

더욱이 시위대가 탈취한 산업용 다이너마이트의 경우 폭발에 필요한 뇌관이 없어 사실상 무용지물이었다는 점도 확인했다.

한국화약(한화) 광주화약고에서 폭약 58t(2천500상자)이 피탈됐다는 당시 합참 기록도 당시 경찰 보안과장의 '경계 및 운반' 보고가 피탈로 전환된 잘못된 기록으로 봤다.

총기는 5·18 항쟁 기간 중 5천3정·실탄 28만9천400여발이 피탈된 것으로 파악됐다.

북한군이 개입해 조직적·계획적으로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주장도 근거가 하나도 없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시위대 무장 시점, 끝내 오리무중

5·18 왜곡 세력이 주된 논리로 내놓는 '시위대 무장 시점'과 관련해서 조사위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 이전에 시위대가 무장했다는 주장은 계엄군의 발포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며 쟁점이 됐지만, 이미 그 전날인 20일 광주역 앞 집단 발포가 규명되면서 자위권 발동이라는 발포 정당성 주장은 퇴색됐다.

조사위는 시위대의 무기고 피습이 대부분 집단 발포 이후에 벌어진 것으로 확인했지만, 나주 반남지서·남평지서 사례의 경우 상반된 기록·증언으로 추후 규명해야 할 사안으로 남았다.

이러한 보고서를 두고도 조사위원간 이견이 나왔다.

보수 추천 위원(3명)은 "집단 발포 전 피습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있다"며 인정하지 않았고, 진보 추천 전원위원(4명)도 "집단 발포 전 피습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고 규명한 경찰의 자체 진상조사 결과조차 반영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결국 무기고 피습 보고서는 양쪽 모두 진상규명 결정에 반대하며 계속 확인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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