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약 1년 전으로 돌려보자. 지난해 3월5일 대한항공과 현대캐피탈이 인천 계양체육관에서 만났다. 당시 대한항공이 승점 69(23승9패), 현대캐피탈이 승점 67(22승10패)로 승점 2 차이로 1,2위를 달리고 있었다. 승점 6점 짜리인 이날 경기 결과에 따라 2022~2023 V리그 남자부 정규리그 우승이 사실상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접전이 예상됐지만, 결과는 싱거웠다. 대한항공의 3-0 승리. 이날 승부가 쉽게 갈린 이유는 세터의 차이였다. 현역 최고의 세터로 꼽히는 대한항공 한선수의 경기운영과 토스워크는 너무나 능수능란했다. 반면 당시 신인이었던 이현승은 정규리그 우승이 달린 중요한 경기라서였을까. 토스워크도 들쑥날쑥했고, 공격 루트 선택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날 승리를 발판삼아 정규리그 3연패를 달성한 대한항공은 현대캐피탈과의 챔프전에서도 3전 전승을 거두며 통합우승 3연패를 달성했다.
시계 다시 현재로 돌려서 지난 6일 인천 계양체육관. 1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졌다. 승점 67(22승11패)의 대한항공과 승점 63(21승11패)의 우리카드가 1,2위를 달리는 상황에서 6라운드 맞대결을 펼쳤다. 이날 승리를 가져가는 팀이 자력으로 우승할 수 있는 매직넘버를 가져갈 수 있었다.
그 결과는? 다들 아다시피, 지난 시즌과는 반대였다. 1년 전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뒀던 대한항공이 충격의 0-3 완패를 당한 것이다. 최근 경기력이 별로였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이날 경기 전까지 파죽의 8연승을 달리고 있었다.
이날 승부를 가른 요인 역시 세터였다. 1년 전 이현승을 상대로 ‘세터학 개론’을 강의했던 한선수의 경기운영과 토스는 평소답지 못했다. 반면 1년 전 이현승과 다르게 고졸 2년차 세터 한태준은 의연했다. 큰 경기임에도 전혀 떨지 않았다. 디그로 걷어올려진 공을 양날개로 올려줄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속공을 과감하게 썼다. 기자석에서 감탄이 나올 정도의 대담한 선택이었다. 대한항공 블로커들이 이후 상황에서 속공을 견제하자 파이프(중앙 후위 공격)를 선택하며 또 한번 상대를 농락했다. 마치 한선수를 보는 듯한 한태준의 경기 운영이었다.
이제 한국 나이로 스물 한 살의 한태준이 현역 최고의 세터로 꼽히는 한선수와 유광우를 상대로 대등하게, 아니 이날 경기만큼은 압도적으로 우위에 섰다. 한태준의 빼어난 경기 운영을 앞세워 우리카드는 대한항공을 3-0으로 셧아웃시키며 정규리그 우승을 향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이날 승리로 승점 3을 추가한 우리카드는 승점 66(22승11패)로 대한항공(승점 67, 22승12패)을 승점 1 차이로 추격했다. 2경기를 남겨둔 대한항공이 남은 경기에서 최대한 쌓을 수 있는 승점은 73. 우리카드가 남은 3경기에서 승점 8을 쌓는다면 역전 우승이 가능하다. 반면 통합 우승 4연패를 노리는 대한항공은 자력으로 정규리그 4연패를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경기 뒤 한태준은 이날 서브득점 4개 포함 19점을 터뜨린 송명근과 함께 수훈선수로 선정되어 인터뷰실에 들어섰다. 한태준은 “지난 5라운드 맞대결에서 2-0으로 앞서다 3-2로 리버스 스윕 당한 게 너무나 분했다. 오늘은 절대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코트에 들어왔는데, 그게 승리의 요인이 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5라운드 패배는 한태준에게 약이 됐다. 그는 “옆에서 형들이 위로해주고, 다독여주셨다. 그리고 저도 스스로 일어나려고 노력했기에 그 패배를 잊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천하의 한선수, 유광우와 대적할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는 한태준이다. 마음가짐부터가 이미 비범하다. 그는 “대한항공과 할 때는 마음이 오히려 편하다. 지더라도 배운다는 마음으로 코트에 들어선다. 상대 세터 형들을 보며 배우고 있다. 오늘도 배우자는 마음, 도전자의 마음으로 코트에 섰다. 경기 전에 형들이 ‘우리끼리 스킨십도 많이 하며 신나게 경기하자’고 했다. 경기를 하면서 서로 하이파이브하고 스킨십하다 보니 긴장도 풀리고 잘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태준은 평소 사령탑인 신영철 감독과 티타임을 자주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감독님께서 불러주시는 것은 너무 감사하지만, 편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배구에 대한 얘기를 바로 하기보다 일상적인 얘기로 편하게 해주신 다음 경기 운영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신다”고 말했다.
시즌 초에 비해 우리카드 멤버구성은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뀌었다. 이날 경기 주전 멤버를 보면 미들 블로커 박진우를 제외하면 다 바뀌었다. 시즌 아웃 당한 마테이 콕(슬로베니아) 대신 아르템 수쉬코(러시아)가 대체 외국인 선수로 왔고, 아포짓 자리엔 아시아쿼터 외국인 선수 오타케 잇세이가 뛴다. 김지한 대신 송명근이 토종 주포 역할을 하고 있다. 미들 블로커 한 자리도 이상현이 주전을 꿰찬 상태다. 한태준은 “5라운드부터 멤버 구성이 크게 바뀌었는데, 바뀐 형들이 앞장서서 이끌어주는 형들이라 저는 맞추기 어렵고 할 게 없다. 저는 형들을 믿고 따라가는 입장이다. 형들이 잘 때려줘서 저는 맞춰주기 너무나 편하다”라고 설명했다.
이날 경기에서 자주 보여준 디그 후 속공, 파이프 활용은 훈련의 결과다. 한태준은 “감독님이 훈련 중에 많이 지시하신 내용이다. 많이 훈련했는데, 경기에 잘 나왔다”라면서 “대한항공 블로킹을 따돌리기 위해선 속공, 파이프를 많이 써야한다고 하셨다”라고 답했다.
우리카드가 남은 세 경기에서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짓는다면 유력한 정규리그 MVP 후보가 될 전망이다. 현재 한태준은 세타당 평균 11.62개의 세트 성공을 기록하며 이 부문 1위에 올라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