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 수많은 지나간 인연 곱씹게 만드는 아련함

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2024. 3. 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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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ize 정수진(칼럼니스트)

사진=CJ ENM

'패스트 라이브즈'를 보는 내내, 초등학교 4학년 때 좋아했던 단짝 남자애가 생각났다. 전학을 떠나면서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지만, 물리적 거리가 있는 그 나이 때 소년소녀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첫사랑이라기엔 너무 어렸고, 아쉬워하기엔 우리가 쌓은 정이 그리 대단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패스트 라이브즈'는 수십 년간 묵혀 있던 아스라한 그 기억과 감정을 건드려 끄집어냈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건,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그 감성이 주효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어느 뉴욕의 바에 앉아 술을 마시는 동양인 남성과 동양인 여성, 그리고 백인 남성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들을 지켜보는 맞은편의 목소리들이 그들의 관계를 궁금해한다. 동양인 남성과 여성이 커플일까? 아니면 동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이 커플? 그것도 아니면 부부 관광객과 가이드? 여러 추측이 오가면서 시간은 24년 전의 과거를 비춘다. 바에 앉아 있던 동양인 남성과 동양인 여성은 24년 전, 한국의 한 초등학교 같은 반 친구인 소년 해성과 소녀 나영이었다. 내내 1등을 하던 나영이 해성에게 뒤져 2등을 하고 눈물을 흘리자, 해성이 그 곁을 묵묵히 지켜줄 만큼 둘은 친하다. 어린 소녀 나영은 엄마에게 커서 해성과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만큼 해성이 좋다. 그러나 나영의 가족은 캐나다 이민을 앞두고 있다. 나영은 왜 이민을 가느냐는 같은 반 친구의 질문에 노벨문학상을 받으려면 외국에 가야 한다는 대답을 남기곤, 절절한 이별의 인사도 없이 해성과 헤어진다. 

사진=CJ ENM

12년이 흘렀다. 20대 청년이 된 해성(유태오)은 영화감독이었던 나영의 아버지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첫사랑 나영을 찾는다. 가족과 함께 떠났던 캐나다 토론토에서 다시 뉴욕으로 이주한 나영(그레타 리)이 그를 발견하며 둘은 다시 절친해진다. 단 영상통화로만. 두 사람은 시간을 맞추고 쪼개어 영상통화를 나누며 친밀해지지만, 마음과는 별개로 서울과 뉴욕에 각각의 삶이 있는지라 더 이상의 진전이 어렵다. 어릴 적엔 노벨문학상을, 지금은 퓰리처상을 꿈꾸는 나영은 '노라'라는 새로운 이름에 맞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데 자꾸만 해성을 보러 서울로 가는 비행기 표를 찾아보고 있는 자신이 두려워진다. 나영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각자의 삶에 충실하자고 제안하고, 해성이 동의하면서 둘은 다시 헤어진다. 

나영과 해성이 잠시 대화를 멈추자고 한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뉴욕과 서울에서 각자의 삶에 충실하게 임한다. 나영은 예술인 레지던시에 만난 아서(존 마가로)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했고, 연극 극본을 쓰며 살아간다. 해성도 연인을 만들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하는 직장인이 되어 살아가는 중이다. 24년 전인 열두 살 때와 12년 전인 20대 청춘 때 교류했던 둘의 인연은 그것으로 끊기나 싶었다가 불현듯 해성이 뉴욕으로 휴가를 오면서 다시 이어진다. 이쯤 되면 수많은 첫사랑 레퍼런스와 막장극에 단련된 관객들은 수만 가지 시나리오를 쓰게 마련이다. 유부녀인 나영이 남편 아서를 버리고 해성과 사랑의 도피를 하려나? 아니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처럼 절절한 사랑만 남기고 떠나가나? '건축학개론'처럼 추억 담긴 카세트테이프 정도는 나오겠지? 설마 '클래식'처럼 누군가 눈이 멀거나 하는 건 아닐 테고 등등등. 

사진=CJ ENM

그러나 '패스트 라이브즈'는 우리가 상상한 그 어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미덕은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잔잔한 장면들 속에 켜켜이 쌓여가는 수만 가지 섬세한 감정들이다. 그리고 그 감정들 사이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인연(因緣)에 대한 대한 곱씹음이 백미다. 한국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존재한다. 나영은 아서를 처음 만났을 때 인연에 대해 설명하며 '한국인들이 작업을 걸 때 쓰는 말'이라고 눙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오묘한 힘이 아니고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어린 시절 서로가 첫사랑이었고, 청춘이었을 때 영상통화 너머로 사랑을 느꼈던 나영과 해성은 어떤 인연이었을까. 8천 겁의 인연이 겹쳐야 부부로 맺어진다는 나영과 아서의 인연은 또 어떻고, 생전 접점이라곤 없어 보이던 해성과 아서가 나영을 통해 뉴욕에서 만나게 되는 인연은 또 어떤 인연일까. 영화를 보면서 특별히 윤회사상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저도 모르게 인연에 대해 곱씹게 된다. 

나영과 해성을 연기한 그레타 리와 유태오는 특별한 이야기와 특별한 대사가 없이도 수많은 감정을 품은 눈빛과 표정, 소소한 움직임으로 두 사람의 인연을 설명해 낸다. 첫사랑, 지나간 사랑의 흔적 등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감정들이 수없이 들이쳤다가 밀려가는 느낌이다. 간질간질한 아련함과 애틋함과 먹먹함이 두 배우의 눈빛으로 흘러나온다. 존 마가로가 연기한 나영의 남편 아서의 마음도 관객들의 마음을 진득하게 건드린다. 특별출연한 장기하는 웃음 포인트. 술자리에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인물이 또 있을까 싶다. 

사진=CJ ENM

여행이 끝나고 해성을 배웅한 뒤 울음을 터뜨리는 나영과 그를 감싸안는 아서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관객들은 부지불식간에 느끼게 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은 인연이라도, 지금의 인연, 지나간 인연, 앞으로 만나게 될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리라는 깨우침. 전 세계 75관왕, 210개 노미네이트라는 '패스트 라이브즈'의 대기록은 그런 깨우침에서 나온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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