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이 마케팅 수단? 출판 불황이 부른 '웃픈' 현실

손효숙 2024. 3. 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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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의 시대'...불황 극복하는 신풍경
절판 도서 마케팅 효과로 재간 후 불티
출판사, 계약 만료 절판 적극 홍보도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1월 출간돼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오른 '퍼스널 MBA'(진성북스)는 1년 전 절판된 책이었다. 저자 조시 카우프만이 경영전문대학원에서 배우는 개념과 적용 방법을 기술한 책은 2014년 '경영서의 바이블'로 소개돼 10년 동안 잔잔한 인기를 끌었다. 출판사의 증보판 준비 작업이 지연되면서 계약 만료로 불가피하게 절판 수순을 밟게 된 것이 흥행을 불렀다. 한 유튜버가 "나의 인생책이자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책"이라고 소개하면서 수요가 급증한 것. 정가 2만 원대 책은 중고시장에서 7만~8만 원에 거래됐고, 한때 40만 원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김재형 진성북스 차장은 "예상 못 했던 반응"이라며 "수요 예측을 못 해 증보판 초판을 1,000부 찍었는데 며칠 만에 다 팔렸다"고 했다.

최근 서점가에선 '절판의 무덤'에서 되살아난 도서의 활약이 심상치 않다. 오래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을 재출간한 뒤 역주행 베스트셀러가 되거나 절판을 앞둔 책을 홍보해 재고를 완판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절판이 반짝 마케팅 수단"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출판시장 불황으로 양질의 책들이 사장되는 업계 막후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희소가치 상승한 고전 복간 러시

1년 절판 기간 동안 명성을 얻으며 지난 1월 재출간 후 역주행 베스트셀러 기록을 세운 '퍼스널 MBA'. 진성북스 제공

절판됐다 재출간되는 건 주로 양질의 번역서다. 빠른 시대변화 속에 검증된 고전에 대한 수요가 여전한 데다 절판 기간을 거치면서 희소가치가 더해져 첫 출간 때보다 더 큰 주목을 받는 경우가 있다. '퍼스널 MBA'의 개정증보판은 지난 1월 출간 이후 한 달 만에 5쇄를 찍으며 약 1만3,000부가 팔렸다. 양장 표지를 입혀 가격이 1만 원 이상 올랐지만, 개정증보판의 한 달 판매량이 2014년 첫 출간 이후 10년간 누적 판매량보다 50.3% 많다.

육아서 '아이는 무엇으로 자라는가'(포레스트북스)도 7년 전 절판됐다가 지난해 12월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해 더 큰 사랑을 받은 경우. 아이를 통제하기보다 격려하고 인격체로 존중하라는 주제를 담은 책은 미국 가족심리학자인 버지니아 사티어의 대표작으로, 2012년엔 '가족 힐링'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서선혜 포레스트북스 편집자는 "오래된 책이라 판권 계약에만 4년이 걸렸는데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며 "출판 불황기에는 묻혀있는 명저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사이토 다카시의 '일류의 조건'도 다음 달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1,000만 부 이상 판매고를 기록한 자기계발서의 바이블로 회자된 책은 절판 후 재출간 요청이 쇄도해 첫 출간 후 18년 만에 다시 나온다.


절판 소식 공지에 재고 완판도

유유 출판사는 5년 전 펴낸 '공부의 기초' 시리즈의 절판 소식을 전해 독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유유 출판사 인스타그램 캡처

인문 학술서를 펴내는 출판사가 절판을 최후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번역서의 판권 사용 기간은 통상 5년인데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 책 판매가 중단된다. 계약 종료 이후 6개월의 유예기간 동안엔 재고 도서를 판매할 수 있다. 최근 인문사회과학 책을 주로 펴내는 출판사들이 절판 홍보에 발 벗고 나서는 이유다.

절판 소식을 출판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지한 후 절판 직전 베스트셀러에 오른 존 루카치 '역사학 공부의 기초', 대니얼 로빈슨 '심리학 공부의 기초', 조지 캐리 '미국 정치사상 공부의 기초'는 대표적 성공 사례다. 미국의 비영리 교육기관 '대학연구소'(ISI)에서 펴낸 '주요 학문 안내서 시리즈' 가운데 고전학, 심리학, 역사학, 정치철학, 미국 정치사상 등을 번역한 '공부 기초 시리즈'는 소수 독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초판으로 찍은 1,500부를 소진하지 못할 만큼 판매 실적이 미미해 절판의 운명을 맞았다. 절판 소식이 알려진 직후 재고 수백 권이 완판되면서 온라인서점 알라딘의 종합 베스트셀러 도서 50위권에 올랐다. 출판사 '뿌리와이파리'도 지난 1월 조지프 헨릭의 '호모사피엔스, 그 성공의 비밀' 등 절판 소식을 SNS에 올려 주목받았다.

조성웅 유유 출판사 대표는 "독자층이 넓지 않은 학술서적과 인문교양서는 후속 독자가 받쳐주지 않기 때문에 책을 절판하는 일이 비교적 흔하고, 절판 주기도 점점 짧아지는 추세"라며 "출판사가 절판을 홍보하는 것은 재고를 소진하면서도 공들여 만든 책이 사장되기 전에 꼭 필요한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말했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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