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고대 일본 권력층 무덤 장식품 수도권에서 최초 발견

노형석 기자 2024. 3. 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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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 백제시대 서울 지역에 고대 일본인 거주 가능성
백제 가마 유적의 폐기물층에서 일본제 하니와 조각이 출토되는 모습.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1500여년 전 백제의 도읍이었던 서울에 일본 열도에서 옮겨온 왜의 이주민들이 살면서 공방 등의 생산활동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주한 왜의 장인들이 만들어 왜인 실력자들 무덤의 장례용품으로 썼다고 추정되는, 고대 일본의 특산 토기들이 잇따라 확인됐기 때문이다.

땅 속 문화유산들을 발굴해 조사하는 기관인 대한문화재연구원은 오늘날의 서울인 한성에 백제 왕조가 도읍을 두었던 한성백제 시기(서기전 18년~서기 475년)의 경기도 성남시 복정동 백제시기 관영 토기가마 관련 유적에서 고대 일본 권력층의 대형 무덤을 장식했던 토기 장식 유물인 ‘하니와’를 처음 발견했다고 6일 밝혔다.

하니와는 5세기 전반기 고대 일본의 전형적인 장식형 토기로, 주로 원통형 모양의 것과 동식물 모양의 상형 조형물, 집 등의 주택 조형물 등으로 나뉜다. 이번에 발굴된 것은 원통형 모양으로 외벽에 구멍을 뚫은 얼개의 5세기 조형물이다.

성남시 복정동 백제 토기가마 관련 유적의 폐기물층에서 나온 5세기 일본의 고분 장식품 하니와의 조각들. 돌출된 띠(돌대)를 붙여서 두르고 있거나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그은 특유의 마무리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하니와 원통형토기의 조각들로 판명됐다. 노형석 기자
일본의 고분 장식품 하니와 조각들의 일부를 가까이서 본 모습. 외벽 표면에 돌출된 띠를 둘렀고 일정한 간격으로 가는 선을 그은 마무리 손질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일본 장인들이 만든 하니와가 출토된 성남시 복정동 영장산 기슭의 백제 토기가마 유적. 당시 백제 왕실에서 운영하던 관영 공방시설의 일부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니와는 이 유적의 폐기물층 속에서 다른 백제토기들과 뒤섞인 채로 발견됐다. 대한문화재연구원 제공

이 유적은 복정동 393번지 영장산 자락 일대 7798㎡의 면적에서 확인된다. 백제시대 나라에서 운영한 것으로 보이는 토기가마와 폐기장 시설들이 흩어져 있는데, 백제 왕성터로 유력한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불과 4~5㎞ 거리여서 왕실이 관장하면서 물품을 조달받는 국영 공방시설의 일부로 추정해 온 곳이다. 관심이 집중된 하니와 조각들은 2022년 유적의 폐기물층에서 전벽돌, 막새, 평기와, 내박자 등 수백여점과 함께 섞여서 나왔다. 돌출된 띠(돌대)를 붙여서 두르고 있거나 외부 기벽 표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죽죽 그은 특유의 긁음 마무리 흔적(일본 고고학용어로 하케메)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하니와 원형토기의 조각들로 판명됐다.

크기가 15~20㎝에 이르는 하니와 조각들은 일부분 원형 구멍이 난 원통형 모양을 띤 것이 특징이다. 일부 조각들은 돌대가 상하로 둘러쳐지거나 이런 돌대의 흔적들이 줄 모양으로 남아있었다. 원통형 하니와 토기 조각의 아래쪽인 저부는 고분 봉분의 지층에 묻는 부위여서 별도로 손질하지 않고 그 위쪽만 손질한 흔적들이 확인된다.

이영철 대한문화재연구원장은 “왜의 장인들이 일본에서 이주해 백제의 관요나 공방에 들어오면서 백제 장인들과 함께 작업한 흔적으로 보인다”면서 “무덤장식물인 하니와 제작품의 실체가 수도권의 백제 시설터에서 명확하게 확인된 것은 사실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앞서 2000년대 초반 백제 왕성터로 유력한 풍납토성을 발굴하면서 손바닥보다 작은 잔편 크기의 하니와 조각들이 석점 가량 나온 적은 있으나 크기가 작고 출토정황이 명확하지 않아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었다.

한일 고대사를 연구해온 역사고고학계 일부 전문가들은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존속한 백제 왕조의 첫 번째 도읍으로 오늘날의 서울 송파구, 강동구, 성남 일대에 해당하는 옛 한성 지역에서 1600년 전 외교관과 장인들을 비롯한 왜인들이 거주하며 활동했음을 알려주는 분명한 근거가 나온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분 장식품 하니와 조각들의 일부를 가까이서 본 모습. 외벽 표면에 돌출된 띠의 흔적과 일정한 간격으로 가는 선을 그은 마무리 손질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노형석 기자
일본 고훈시대의 장고형 무덤(전방후원분)인 고베 고시키츠카 고분. 봉분의 꼭대기와 아래쪽 부분에 원통형 장식토기 하니와가 열을 이뤄 복원된 모습이 보인다. 고베공식관광사이트

특히 하니와는 4~6세기 일본의 고훈시대 권력자, 실력자들의 대형 무덤(장고형 무덤으로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름)에 빠지지 않는 봉분의 중요 장식부재였다는 점에서 1600년~1500년 전 고대 일본의 이주민들이 백제의 서울 도읍에 살면서 특유의 무덤을 짓고 장식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이 하니와 조각의 발견으로 백제 수도 한성일대에 왜의 장인과 외교관 등이 옮겨와 일종의 이주민 촌을 형성했을 것이란 추론도 세울 수 있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양국 학계는 고대 한반도에서 일본과 직교류한 유력한 대상지로 전라도 영산강 일대를 지목해왔다. 지난 30여년간 이 지역에서는 왜계 이주민의 것으로 보이는 장고형 무덤이 숱하게 확인됐고 원통형 외에 말과 사람 등을 형상화한 하니와도 상당수 출토된 바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하니와의 발견은 영산강 유역 직교류설에 기반한 기존 학계의 논의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백제 중앙정부가 있었던 수도권 일대 공방에서 영산강 유역의 왜계 유물보다 시기가 앞서는 5세기 전반께의 하니와가 확인됐고, 이 하니와를 봉분 장식물로 쓴 왜인들의 무덤도 수도권 일대에 조성됐을 것이란 추론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백제 중앙정부와 고대 일본 정부(야마토 조정)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먼저 진행된 뒤 백제 지방 영역인 영산강 유역과 왜와의 교류가 이어졌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연구원 쪽은 내달 정식 보고서를 출간할 예정이어서 유물의 성격을 놓고 학계의 논의가 달아오를 것으로 보인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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