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이 좋은 화폐가 되기 어려운 이유

한겨레 2024. 3. 7.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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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리포트] 임일섭의 화폐를 다시 생각하다
클립아트코리아

정의는 언젠가는 승리하고, 진실은 언젠가는 빛을 보게 되리라고 많은 사람이 믿는다. 시장경제에서는 결국 좋은 상품과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폐 시장에서는 다른 격언이 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

‘그레샴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주장은, 역사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진리가 아니다. 귀금속 등이 화폐의 소재로 사용되면서 화폐가치를 담보하던 시절에 부합하는 명제일 뿐이다. 여기서 악화, 즉 ‘나쁜 돈’이란 소재의 가치가 액면가를 밑도는 돈을 지칭한다. 예컨대 금화의 경우, 금 함량의 실제 가치가 금화의 액면가를 밑도는 경우다. 반대로 양화, 즉 ‘좋은 돈’이란 소재가치가 액면가와 일치하거나 웃도는 돈이다. 악화와 양화는 시장에서 동일한 액면가로 교환된다. 양화의 소유자 입장에서 보면, 보다 많은 금을 보다 적은 금과 교환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보다 많은 금을 함유한 양화는 점차 유통 시장에서 사라지게 되고, 결국 악화만 지급수단으로 살아남는다.

그레샴의 법칙은 주로 금·은 등의 귀금속 화폐를 사례로 논의되지만, 비교적 소액 거래에 사용되었던 구리 주화에 대해서도 유사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 등으로 구리 가격이 상승하면 구리 주화의 소재 가치가 액면가를 상회하게 되며, 이에 따라 구리 주화는 더는 화폐로 사용되지 않고 유통 시장에서 퇴장한다. 구리 주화를 녹여서 얻을 수 있는 구리의 시장가격이 구리 주화의 액면가보다 높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구리 주화를 소액의 지급수단으로 사용했던 중세 유럽은 ‘잔돈 부족’이라는 문제에 자주 시달렸다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거시경제학자 토마스 사전트 뉴욕대 교수는 ‘잔돈이라는 큰 문제’(Big problem of small change)라는 제목의 저서에서 당시 금속화폐의 문제점과 해결 과정을 다룬 바 있다.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매커니즘

그레샴의 법칙이 성립하는 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화폐 가치가 그 소재 가치에 의해 담보된다는 점, 즉 금속화폐라는 점이며, 둘째로 화폐 간에 액면가로의 교환이 강제된다는 점이다. 만약 상품화폐라고 하더라도 액면가로의 교환이 강제되지 않는다면, 즉 여러 화폐 간의 교환비율이 자유롭게 변동한다면, 그레샴의 법칙은 성립하지 않는다. 금 함량이 낮은 금화가 함량이 높은 금화보다 낮은 가격으로 교환된다면, 악화와 양화가 각각 상이한 가격을 가지면서 공존할 수 있다. 요컨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역설적인 현상은 화폐 간의 자유 경쟁의 귀결이 아니다. 그레샴의 법칙은 화폐 간의 고정된 교환비율, 즉 액면가에 따른 거래가 강제되는 화폐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나타난 현상이다. 그러나 액면가 보장은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지급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금속 함량이 충분한 좋은 화폐가 유통에서 퇴장하고, 금속 함량이 떨어지는 나쁜 화폐만 살아남는 것은 금속화폐 제도에서는 불가피하다. 이러한 금속화폐의 단점은 금속의 함량을 떨어뜨리는 행위를 어렵게 만드는 주조기술의 발전 등에 의해 어느 정도 억제돼 오다가, 결국 물리적 소재와 화폐가치 사이의 단절을 선언한 명목화폐가 금속화폐를 대체하게 되었다. (* 지금도 ‘동전’이 발행되지만, 동전의 가치는 물리적 소재인 금속이 아니라 발행자의 신용 또는 국가권력에 의해 담보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주화는 금속화폐라기보다는 명목화폐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명목화폐 또한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명목화폐는 물리적 소재에 의존하지 않는 화폐 발행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화폐 발행이 금속의 공급량에 종속되는 금속화폐의 단점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속화폐와 달리, 화폐 발행자의 자산이 화폐가치를 담보함에 따라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했다. 금화의 경우 금 함량과 액면가 사이의 괴리 탓에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나타난 반면, 대표적 명목화폐인 은행화폐는 발행자인 은행에 대한 평가에 따라 화폐가치가 변동하면서 액면가대로 거래되지 않는 문제점이 나타났다. 다수의 민간은행이 각자 은행권을 발행하던 미국의 자유은행 시대(1836-1863)에 이런 현상은 자주 불거졌다.

자유은행 시대에 민간은행들이 발행한 개별 민간은행권은 은행 자산의 건전성에 대한 평가, 지리적 격차에 따른 상환청구의 어려움 등에 따라 할인되어 유통되었다. 수많은 민간은행권의 시세 변동을 알려주는 정보지가 매주 발간될 정도였다. 이러한 혼란은 1863년 전국은행법 제정을 통한 단일은행권의 발행 등을 거치면서 이후 중앙은행 설립, 예금보험 도입 등을 통해서 해소됐다.

로이터 연합뉴스

좋은 화폐의 기준? 단일성의 확보!

화폐의 액면가 보장의 중요성은 현대적인 용어로는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으로 표현된다. 이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공공화폐와 다수의 민간화폐가 액면가에 따라 교환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가리킨다. 지난 100여년이 넘는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지급결제시스템과 중앙은행의 최종대부 기능, 그리고 예금보험은 화폐의 단일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들이다.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사용되지만, 최종 결제는 중앙은행의 공공화폐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중(two-tiered) 통화제도의 확립, 결제자산의 일시적 부족에 직면한 민간화폐 발행자에게 자금을 빌려주는 중앙은행의 최종대부 기능, 그리고 민간화폐와 공공화폐의 일대일 교환을 보장하는 예금보험 등은 모두 화폐의 단일성 보장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많은 제도의 진화과정에서 드러나듯이, 이론과 설명은 현실에 후행한다. 화폐제도 진화과정의 복잡성, 민간은행과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인식의 지체는 이른바 암호화폐의 도전을 야기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됐다. 중개자가 없는 피투피 전자화폐시스템을 기치로 등장한 비트코인은 창시자의 포부와는 거리가 있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투자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비트코인의 초기 비전은 스테이블코인에 의해 계승되었다.

민간은행권과 유사한 스테이블코인

옹호자들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은 이렇다. 기존의 법정화폐와 연동하여 가치의 안정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중개자 없는 가치이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의 비유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마치 전자우편을 보내는 것처럼, 은행 등의 중개자들에 의존하지 않고 지구 상의 누구에게나 거의 실시간으로 송금할 수 있는 미래의 화폐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은 비트코인과 달리 발행자의 사적 부채라는 점에서 일종의 민간화폐다. 화폐의 역사는 민간화폐가 지급수단으로 이용될 경우, 화폐의 단일성을 위해 보다 안전한 공공화폐로의 최종 결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공공화폐와 민간화폐의 일대일 교환을 보장하는 예금보험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스테이블코인은 지급결제시스템의 외부에 있으며, 예금보험도 적용되지 않는다. 전통적 예금보험은 계좌기반 화폐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토큰기반 화폐인 스테이블코인에 그대로 적용하기도 어렵다. 요컨대 스테이블코인은 화폐의 단일성을 위해 구축되어 온 금융안전망의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과거의 화폐, 자유은행 시대의 민간은행권과 유사하다. 그레샴의 시대에 ‘양화’는 금속 함량과 액면가가 일치하는 돈을 의미했지만, 현대 화폐제도에서 ‘양화’는 화폐의 단일성이 유지될 수 있는 돈이다. 이런 맥락에서 스테이블코인은 좋은 돈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티이미지

암호화 기술에 기반을 둔 분산원장이 아무리 발전하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지급결제시스템을 대체할 수는 없다. 분산원장이 다루는 문제는 데이터의 위·변조 차단과 무결성 확보인 반면, 지급결제시스템과 예금보험이 다루는 문제는 민간화폐의 신용위험이다. 분산원장 기술이 민간화폐의 신용위험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뱅크런과 금융위기의 원인이 위조지폐나 송금 오류에 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다.

한편 최근 국제결제은행(BIS) 등은 스테이블코인이 전통적인 이중통화제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화폐의 단일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 대안으로 이중통화제도에 기반을 둔 예금 토큰과 새로운 결제자산(도매형 씨비디씨)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예금 토큰의 장점이자 편익은 프로그램화된 화폐의 가능성, 즉 스마트계약을 활용하여 신속하고 효율적인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시된 예금 토큰의 실질적인 효과는 거래의 일부 단계를 자동화하는 데 있을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편익이 예금토큰에 대응하는 새로운 결제자산의 도입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는지는 추가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임일섭 예금보험공사 예금보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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