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창작뮤지컬이 신선하다고요? 젊은 여성 창작자의 힘입니다"

김소연 2024. 3.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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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피화당',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마리 퀴리' 등
개성 있는 소재·작법의 화제작, 여성 창작자들이 이끌어

뮤지컬 100년 역사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는 오랫동안 '보이스 클럽(Boy's Club·남성중심사회)'이었다. 1998년에서야 '라이온 킹'의 줄리 테이머가 여성 최초로 토니상 뮤지컬 연출상을 받았고, 작곡 부문의 첫 여성 단독 수상자는 2013년 '킹키 부츠'의 신디 로퍼였다.

역사가 70년 남짓한 한국 뮤지컬계는 여성 창작자의 활약이 꾸준한 편이었다. 인력 풀이 넓지 않은데도 이유리·이지나·장유정(연출), 오은희·이희준·한아름(극작), 장소영(작곡) 등이 2000년대에 굵직한 작품을 이끌었다. 최근에는 그 바람이 더 거세다. 본격적으로 뮤지컬을 보고 성장한 뒤 전공으로 공부까지 한 여성 '뮤지컬 키즈'들이 중심이다. 연극·영화 등을 겸업한 이전 세대와 달리 소재와 작법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내가 주목한 인물이 역사의 주인공

뮤지컬 '여기, 피화당'. 홍컴퍼니 제공

'뮤지컬 키즈'의 활약으로 요즘 창작 뮤지컬은 소재가 다양해졌다. 사극 뮤지컬 '여기, 피화당'(4월 14일까지 플러스시어터)은 연출(한유주)과 극작(김한솔), 작곡(김진희)을 모두 여성이 맡았다. 17세기 조선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끌려갔다 귀국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피화당'이라 이름 지은 동굴에 숨어든 세 여자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서사가 전개된다. 작자 미상의 여성 영웅 소설 '박씨전'을 극중극으로 녹였다. '이순신' '명성황후' 등 이름난 인물을 다룬 이전 사극 뮤지컬과 결이 다르다.

'여기, 피화당'의 극작가 김한솔(왼쪽)과 작곡가 김진희. 홍컴퍼니 제공

해외 무대에 진출한 독특한 소재의 창작 뮤지컬들도 여성의 시선에서 탄생했다. 지난달 일본 도쿄에서 라이선스 형식으로 공연된 '전설의 리틀 농구단'엔 여성 작가(박해림)와 작곡가(황예슬)가 참여했다. 2016년 경기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초연 당시 농구를 소재로 한 첫 뮤지컬로 화제를 모았고, 농구를 활용한 안무로 2019년 예그린뮤지컬어워드에서 안무상을 받았다.

오는 6월 1일부터 한국 뮤지컬 최초로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영어 버전으로 장기 공연되는 '마리 퀴리'는 여성 극작가 천세은의 뮤지컬 데뷔작이다. 2018년 트라이아웃 공연을 거쳐 2020년 초연됐고 폴란드, 일본, 중국에서 선보였다. 뮤지컬에서 잘 다루지 않는 과학자의 삶을 그리면서 무대엔 주기율표와 과학실험 도구들이 등장한다.

지난해 11월 24일 영국 런던 디 아더 팰리스에서 열린 뮤지컬 '마리 퀴리'의 쇼케이스. 라이브 제공
뮤지컬 '마리 퀴리'를 쓴 작가 천세은. ⓒ류소진 작가

기승전결 분명하지 않아도 괜찮아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공연제작소 작작 제공

젊은 여성 창작자들은 기승전결이 분명한 드라마만 고집하지 않는다.

지난달 공연된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는 소재도, 구성도 독특했다. 미국 시인 실비아 플라스의 이야기를 그린 '실비아, 살다'로 호흡을 맞춘 조윤지(극작·연출), 김승민(작곡) 콤비의 작품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앓는 주인공 키키의 이야기를 치료 단계별로 따라가는 나열식 구성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뮤지컬 '키키의 경계성 인격장애 다이어리', '실비아, 살다'를 연출한 극작가 겸 연출가 조윤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해피엔딩의 문법도 달라졌다. 다음 달 19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개막하는 서울시뮤지컬단의 '더 트라이브'는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유물 복원가 조셉과 시나리오 작가 끌로이가 각자 삶의 해피엔딩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두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마다 춤을 추며 등장하는 고대 부족과 얽히는 코미디 뮤지컬이다. 전동민(극작·연출), 임나래(작곡·편곡·음악감독) 등 여성 신예 창작진이 만들었다. 예술감독인 김덕희 서울시뮤지컬단장은 "창작진이 정의하는 해피엔딩은 꿈을 이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라며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게 요즘 젊은 여성 창작자들의 특징"이라고 짚었다.


제작자 의뢰 없어도 일단 쓴다

뮤지컬 '더 트라이브'의 연출가 전동민(왼쪽)과 작곡가 임나래. 세종문화회관 제공

여성 창작자들의 개성 넘치는 작업은 다양한 창작 인큐베이팅 사업의 등장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자신만의 글감과 음악을 시험해 볼 무대가 많아진 셈이다. 대학로의 주목받는 여러 작품이 이 같은 창작 지원 사업을 통해 발굴됐다.

'마리 퀴리'는 공연 제작사 라이브의 공모 당선작(작가 부문) 초고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실비아, 살다'와 '여기, 피화당'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뮤지컬아카데미에서 처음 선보인 후 수정을 거쳐 대학로에서 정식 공연되는 절차를 밟았다.

박병성 공연 칼럼니스트는 "2000년대 초반 한국 뮤지컬 산업화 시기부터 꾸준히 뮤지컬을 접해 온 '뮤지컬 키즈'가 한정된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던 창작 뮤지컬계에 신선한 흐름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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