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살구의 우연한 운명
살색 크레파스를 기억한다. 많은 한국 여성이 사용하는 파운데이션과 비슷한 색이었다. 파운데이션은 얼굴색을 깨끗하고 화사하게 표현하기 위한 색조 화장품이다. 언젠가 초등학생 아이의 교구를 챙기던 중 살색 크레파스가 '살구색'으로 색이름이 바뀐 것을 봤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인종에 대한 차별의 소지가 있어, 수정을 권고한 데 따른 것이라 한다. 살색 크레파스와 내 피부색이 다르면 나는 이상한건가? 외국인 피부색은 그럼 '살'이 아닌 무슨 색으로 칠해야 하나? 하는 차별적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애초에 피부색의 표준으로 설정하고자 살색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테고, 살색 물감이 등장한 60년대 당시, 관용적인 표현 그대로 포장지에 표기했으리라. 색이름은 한 문화권에서 반복 사용되면 관용어로서 받아들여진다. 수박색, 팥죽색, 미색 등은 한국인 먹거리와 관련이 깊어 일상에서 흔히 소통된 결과로 관용어로 자리 잡은 예시다. 금발색, 올리브색 등은 서양 문화권의 관용색이다. 글로벌 시대 인종차별적 표현이 더욱 불편하게 느껴지던 차, 마침 이름이 살'구'인 우리에게 친숙한 과일이 있고, 그 과일의 색이 한국인의 피부색과 어느 정도 닮은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우연이다.
미술 시간 살색 크레파스 하나로 도화지 내 모든 얼굴을 색칠하며 자랐던 필자는 화장을 하는 사회인이 되면서부터 21호를 학습했다. 최근 남성 화장품 시장도 크게 성장했으나 신문 지면을 즐기는 독자층을 조심스럽게 고려해 설명하자면, 21호는 파운데이션 화장품의 제품 번호다. 해외 명품 브랜드조차도 국내에서 파운데이션 제품을 판매하려면 21호에 대응되는 색의 제품을 정해놓는다. 한국 고객이 21호를 찾기 때문이다. 21호는 한국의 화장품 기업이 시작한 제품색 기호인데, 어느덧 관용어로 자리매김한 셈이다. 인종적 다양성이 낮은 한국에서 21호의 독주는 자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21호가 어떤 색이다, 라고 고정돼 있는 것은 아니고 트랜드에 맞게 밝기나 색상이 조금씩 바뀐다는 것이다. 호기심에 직접 측색기로 계측을 해보니 해외 명품 브랜드가 각자 21호에 해당하는 제품이라고 소개하는 파운데이션 제품의 색은 상당히 다양했다. 변하지 않았던 것은 기성세대에 속한 한국 여성의 다수가 스스로를 21호 사용하는 사람으로 소망해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살구색 크레파스를 사용한 세대는 정말 피부의 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적은가? 그들이 성인이 된 지금, 글로벌 브랜드는 적게는 열댓 개, 많으면 쉰 개가 넘는 색의 파운데이션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백화점 1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뭐가 다른지 구분조차 힘든데, 왜 저렇게 많이 만들어서 팔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질문이다. 얼굴색에 대한 판단은 건강 상태, 호감 여부, 감정 기복의 신호와 직결되므로 아주 예민하게 인지하도록 인류가 진화했다. 더군다나 내 얼굴의 색이면 작은 차이에 대해 더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진화론에 기반한 인지과학적 근거는 개인 브랜딩 시대를 맞아 더욱 주목받는다. 21호를 시작했던 그 한국 기업은 최근 150가지가 넘는 파운데이션 색을 준비해놓고 고객을 맞이하고 있다. 너와 나는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소중하고 특별한 것이다.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는 MZ 세대에게도 설득력이 있다. 정말 살구색 정책이 다양한 얼굴색을 인정하는 효과를 본 것일까? 아니면 화장품 제조 기술이 발전했고, 개인의 취향과 개성을 존중하는 맞춤형 사업이 우연하게도 유행하는 덕분일까?
살구는 순우리말이다. 간혹 한자말로 오인되어 죽일 살(殺), 개 구(狗)로 잘못 소통된 적도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살을 닮은 색이름이자 비차별적 표현으로 큰 역할을 했던 살구가 우연하게도 殺로 풀이됐을 뻔했다. 살구는 늘 우연을 운명처럼 맞이한다.
석현정 카이스트 교수 겸 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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