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고분’ 속 ‘모계 근친혼’ 흔적…1500년 전 영산강은 ‘여인천하’였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996년 5월 어느 날이었다. 영산강 유역인 전남 나주 다시면 복암리 3호분을 발굴 중이던 전남대 조사단이 심상치않은 징후를 발견했다. 굴삭기로 쌓인 소나무를 정리하면서 흙을 걷어내다가 큰 판석(판자 모양의 큰 돌)들이 노출된 것이었다.
판석과 판석 사이에 주먹 크기의 틈새가 보였다. 고분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흥분된 마음으로 손전등을 비춰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함척(函尺·측량 자)을 넣어 보았다. 하염없이 들어갔다. 180㎝도 넘는 깊이였다.
■금동신발을 신은 주인공
틈 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니 뭔가 독(옹) 같은 유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도굴의 화를 입지않은 돌방무덤(석실분)임을 직감했다. 이 돌방무덤에 복암리 3호분 96석실(돌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박물관의 대대적인 조사가 7월8일부터 두 달간 이어졌다.
발굴결과는 놀라웠다. 대형 독널(옹관)이 앞뒤 2개씩 4개나 노출됐다. 독널의 크기는 엄청났다. 2호 독널의 경우 큰 독(98.2㎝)과 작은 독(72.2㎝)을 합체한 크기가 150㎝ 정도에 이르렀다. 독널 한 기만이 놓인 4호는 1m에 가까웠다.
또 ‘금·은으로 장식한 세 잎사귀 둥근고리칼’과 각종 도기류, 철대도·철촉 등 철기, 말띠드리개·재갈·발걸이 등 말갖춤새가 쏟아졌다. 이것은 양념에 불과했다. 앞 오른쪽 독널(4호) 밑에서 진흙이 묻고 상당 부분 훼손된 금동신발이 노출됐다.
이 복암리 3호분에서는 ‘96석실’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봉분(3호분)에서 41기나 되는 다양한 무덤이 켜켜이 조성되어 있었다. 3세기부터 이 지역에서 발달한 독널무덤(옹관묘)부터 전형적인 백제식 돌방무덤(석실분·7세기)까지….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한 집단이 400년에 걸쳐 조영한 이른바 ‘아파트형 고분’이라 할 만 하다. 가히 ‘고분박물관’이다.
그 중 대형 독널과 금동신발 및 고리자루칼 등 최고 위세품이 쏟아져 나온 96석실이 단연 돋보인다.
연구자들은 이 96석실의 주인공을 5세기말~6세기초 이 지역을 다스린 수장으로 추정한다.
■유전자 분석의 결과
그런데 최근까지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과 관련해서 간과된 ‘포인트’가 있다.
그것이 96석실에서 확인된 인골의 정체성이다. 1996년 발굴 당시 96석실에서는 모두 6개체분의 인골이 독널 3곳(1·2·3호)에서 확인됐다. 죽은 자들의 인골을 추려서 각 독널에 넣은 것이다. 그런데 발굴이 끝난지 5년 뒤인 2001년이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 출토된 인골에서 채취한 시료 10편의 ‘미토콘드리아DNA’를 분석해보았다.
미토콘드리아는 동물세포 안의 호흡기관으로 존재하는 세포의 소기관이다.
원형의 이중나선을 지니고 있는 미토콘드리아는 약 99.9%를 난자로부터 형성하여 모계유전 된다.
형제, 자매, 남매 및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관계되는 모든 가족은 미토콘드리아 DNA가 일치하는 반복수를 지닌다.
인골 같이 오래되었거나 극히 미량인 시료에서도 추출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미토콘드리아 DNA의 반복수를 개인의 식별이나 가족 관계의 구명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예상밖 유전자 분석결과
연구소의 분석 결과 독널(옹관) 3호의 왼쪽 인골(남성)과 오른쪽 인골(여성)은 남녀로 판단됐다.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은 더욱 흥미로웠다. 두 인골은 모계 유전 간의 혈통관계로 추정됐다.
고변이부위 가운데 하나인 HV1의 염기배열이 16018~16378 베이스까지 서로 일치한 것이다.
이로써 모계 유전 간의 관계임을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분석한 <보고서>는 ‘96석실=모계가 동일한 친족의 합장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그 뒤에 붙인 ‘보고서 요약문’이 흥미롭다. “이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은 남매, 혹은 모자 등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상간(近親相姦) 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1500년 전 영산강 유역이 ‘모계 사회’를 이루고 있었고, 같은 모계의 남녀가 근친혼을 했다?
흥미로운 분석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라에서 공공연히 이루어졌던 근친혼이 영산강 유역에서도 유행했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러나 딩시에는 이 분석 결과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복암리 3호분 96석실에서만 나온 하나의 사례를 요란하게 내세우기가 왠지 ‘거시기’ 했던 것이다.
■‘강력사건’(?) 신고전화
그런데 복암리 인골의 기억이 가물가물 사라졌을 무렵인 2005년 2월이었다.
복암리에서 2㎞ 정도 떨어진 나주 영동리의 둔덕에서 대나무 숲을 개간하던 주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112’ 전화를 걸었다.
“사람의 해골이 2구나 발견됐다”는 것이었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순간 강력사건을 떠올렸다.
‘백골 상태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살인 혹은 시신 유기 사건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둘러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인골이 땅속에 묻혀있다가 나온 게 아니라 고분의 돌덧널(석곽) 안에서 노출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나주시로 유물 출토 사실을 신고했다. 연구자인 이정호 동신대교수가 달려왔다.
돌덧널 무덤 안에서는 2구의 머리뼈가 나란히 노출됐다, 그 아래로 몸뼈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뼈만 남은 유골을 정리해서 재매장한 삼국시대 장례의식(2차장)으로 인식되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 1기 뿐이 아니었다. 이 무덤은 큼지막한 봉분의 윗부분에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무덤들도 이 봉분 위에 박혀있었다. 일부는 파괴된 채 노출되어 있었다. 이제 강력사건에서 발굴조사(동신대박물관)로 바통터치 했다.
이후 4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나주 영동리의 고분에는 모두 7기의 무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중 조사된 5기의 고분에서 구덩무덤(토광묘)과 독널무덤(옹관묘)·돌덧널무덤(석곽묘)·돌방무덤(석실묘) 등이 계속 확인된 것이다. 인근 복암리의 아파트형 고분과 흡사했다. 그러나 복암리에서처럼 지체높은 분의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래도 출토유물은 독널(옹관)을 비롯해 모두 280여 점에 이르렀다.
■나란히 묻힌 남매
유물로 미루어보면 무슨 획기적인 발굴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영동리 고분의 ‘α와 Ω’는 역시 여러 무덤에서 확인된 인골이었다.
출토 양상도 심상치 않았고, 인골의 형질 및 미토콘드리아DNA 분석결과도 의미심장했다.
즉 대부분의 고분에서 어머니가 같은 계통인 모계가 묻힌 흔적이 역력했다.
우선 첫번째 조사에서 확인된 1호분만 봐도 그렇다. 아래 위로 1호 돌덧널무덤과 1~6호 돌방이 모여있다.
겉으로 보기에도 같은 가문의 고분일 가능성이 높다. 이중 1호 돌덧널에서 확인된 2구의 인골을 보자.
형질 분석 결과 여성은 20대 전반, 남성은 40대 전반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이 두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은 모계(어머니쪽 계통)가 동일한 남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를 보였다.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년이나 차이가 나는 남매를 왜 같은 자리에 사이좋게 묻어 주었을까.
20년 먼저 죽은 누이와 함께 묻혀야 했던 이유가 있을까. 그토록 우애가 깊은 남매였을까. 아니면 근친혼 관계였을까.
■여성 전용 무덤도
2호 돌방무덤은 어떨까. 무덤의 돌문짝을 열자 무덤방에서 ‘우르르’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
인골 2구의 머리뼈가 가장 안쪽 벽에 붙어 세워진채 나란히 놓여있었다. 양쪽 벽과 심지어는 입구 쪽에서도 머리뼈와 함께 뒤섞인 몸뼈가 확인됐다. 2호 돌방무덤에서만 모두 7구의 인골이 확인됐다.
분석 결과 7구 가운데 3구는 5살도 안된 어린이 인골로 추정됐다. 조사단의 분석결과 이 2호 돌방에 묻힌 주검은 2호 남성(50대)→1호 여성(60대)→3호 유아→4호 유아→5호 유아(이상 5세 이하)→6호 여성(40대)→7호 남성(30대) 순으로 묻힌 것으로 짐작된다. 묻힌 이들은 같은 모계 관게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남성 한 개체(30대)는 다른 곳에서 장가온 데릴 사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영산강 유역의 모계 사회에 장가든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또 5기의 주검이 확인된 3호 돌방의 경우 1호 여성(60대)→2호 여성(20대)→4호 여성(10대 후반)→5호 유아(5세 이하)→3호 인골(미상)의 순으로 묻혔다. 그런데 5세 이하 유아이거나 성별 미상의 인골을 빼면 모두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김재현 동아대 교수) 그렇다면 이 3호 돌방은 ‘여성 전용 고분’일 가능성도 있다. 또하나 착안점은 2호와 3호 돌방무덤에는 오로지 주검(시신)만 매장했다. 죽은 순서대로 인골만 추려 안장했다.
4호 돌방은 굉장히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다른 돌방무덤과 달리 두 개의 돌방을 이뤄진 ‘짝돌방(쌍실)’이다.
한 가운데 두꺼운 판석을 세워 두 개의 방으로 나눴다. 훼손이 심했던 한쪽 방의 유물 분석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한쪽 방에서는 50대 남성과 40대 여성, 다른 공간에는 30대 여성의 유골이 남아있었다. 중요한 착안점은 50대 남성과 같이 묻힌 40대 여성은 모계가 같은 남매 사이일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이들이 남매라면 역시 근친혼의 방증일까.
또 하나 특이점은 이 40대 여성에게는 출산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과 함께 묻힌 30대 여성은 누구일까. 50대 남성의 딸일까.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장한 주인공
이 대목에서 1996년 조사된 나주 복암리 3호분 96석실의 인골을 ‘급소환’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골의 미토콘트리아DNA 분석결과가 어땠나. 합장묘(96석실)의 주인공이 모계가 동일한 친족이거나, 부부묘일 경우 근친혼이라고 했다. 그런데 영동리에서까지 똑같은 사례가 확인됐다면 어떨까. ‘1500년 전 영산강 유역=모계 중심의 사회’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한 두 곳의 발굴 사례로 100%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2014년 복암리 고분군에서 600m 떨어진 잠애산(해발 114m) 구릉의 정촌 고분에서 또한차례 의미심장한 발굴성과가 나왔다. 정촌 고분 역시 14기의 무덤이 조성된 ‘아파트형’이었다. 특히 너비 355㎝, 길이 480㎝, 높이 296㎝ 규모의 무덤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이 주목을 끌었다.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이 무덤에는 3기의 나무관이 차례로 안치되었는데, 그 중에서 2개체의 인골이 확인됐다.
부스러진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확인된 1개체는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한 나무관의 주인공으로 판단됐다. 또 머리뼈 등이 수습된 인골의 주인공은 3차(5세기 4/4분기~6세기 1/4분기·475~525년)로 안장한 것으로 추정됐다. 또 3차 주인공의 부근에서는 금동신발과 다량의 유리구슬, 옥류 등이 확인됐다.
금동신발 속에서는 주인공의 발목뼈 조각 1개와 다량의 파리번데기 껍질이 확인되었다. 번데기 껍질에서 추출한 콜라겐으로 연대를 측정해보니 ‘400~420년’ 사이였다. 무덤에서 출토된 도기와 말갖춤새 등의 연대는 450~475년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이 고분의 연대는 늦어도 ‘475년 전후’로 조성된 고분(1호분)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인근의 복암리와 영동리 고분과 비슷한 연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대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이 지역 수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말은 안해도 수장이라면 당연히 남성일 것으로 판단했다.
■영산강 유역을 다스린 40대 여인
그러나 2017년 가톨릭대 산학협력단이 실시한 두 인골의 3차원 계측 결과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두 인골 모두 여성으로 추정된 것이다. 즉 1차 안장 인골의 경우 3차원으로 복원한 아래턱뼈의 앞뒤 길이와 아래턱뼈가지의 높이를 역시 3차원 공간에서 계측한 결과 75.96㎜와 60.26㎜였다.
이 수치를 한국인의 아래턱뼈를 이용한 성별판별 공식에 대입해보니 ‘여성’으로 판별됐다. 이는 위팔뼈의 앞면을 바닥에 놓고 위팔뼈의 아래면을 관찰할 때 안쪽관절융기의 방향이 바닥면과 수평을 이루면 남성, 위쪽을 향하면 여성으로 추정하는 방법이다. 3차로 안장된 여성의 경우도 같은 방법으로 분석한 결과 여성으로 판단됐다. 두 인골의 치아 상태로 측정한 나이는 45(3차 주인공 여성)~47세(1차 주인공 여성) 정도로 측정됐다.
또 3차 주인공 주변에서 출토된 금동조각(19점 이상 출토)이 금동관의 밑동 테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피장자는 금동신발은 물론 금동관을 착용한 채 묻혔다는 얘기가 된다. 5세기 후반~6세기초 영산강 유역의 너른 들판을 호령한 수장이 ‘40대 여성’이라는 얘기가 된다. 이 여성이 당대 백제 중앙정부로부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사여받을 정도로 높은 위상을 과시했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산강 유역=글로벌 사회
이렇듯 복암리에서, 영동리에서, 정촌에서 잇달아 나타나는 ‘여성파워’, 즉 모계사회의 흔적을 보면서 한가지 드는 생각이 있다. 이제 역사를 공부할 때 섣부른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따위는 벗어던져야 할 것 같다는….
단적인 예가 영동리에서 보인다. 영동리 3호분의 2호 석실에서 출토된 ‘세 발 달린 접시’(삼족배)와 ‘꼭지 달린 뚜껑’이 그 예다. 즉 ‘세 발 달린 접시’는 전형적인 백제 도기이다. 반면 이 ‘세 발 달린 접시’의 ‘꼭지 달린 뚜껑’은 신라만의 독특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영산강 지역의 도공은 이 백제 접시에 신라 뚜껑을 덮어 놓은 상태에서 구운 것 같다.
접시와 뚜껑에서 이기재(離器材·가마에서 그릇을 포개 구울 때 들러붙은 것을 방지하려고 그릇 사이에 두는 물질)의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상할 수 있다. 백제 도공과 신라 도공이 이곳에서 만나 ‘백제·신라 합작 도기’를 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 뿐일까. 영산강 유역의 고분과, 그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은 ‘백제 및 토착세력’이라는 핵심요소와, 가야·신라·왜와 같은 주변 요소가 섞여있다. 이를 두고 실체를 알 수 없는 ‘800년 마한론’을 고집하는 것은 편협한 지역고고학이다.
1500년 전인 5세기 말~6세기 초 영산강 유역이 상상 이상으로 ‘글로벌 사회’였던 것 같다. 나주 벌판처럼 확 트인 시야를 갖는게 어떠한가.(이 기사를 위해 동신대 이정호 교수와 이수진 교수, 김재현 동아대 교수, 이한상 대전대 교수, 전용호 문화재청 발굴제도과 학예연구관이 자료와 도움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이수진, ‘나주 영동리 고분 발굴 이야기, 천오백년 동안의 잠을 깨우다’, <천오백년전 나주의 기억>, 동신대 영산강문화연구센터 엮음, 2023
이정호, ‘출토 유물로 본 영동리 고분 세력의 대외관계’, <6~7세기 영산강유역과 백제>(국제학술대회), 동신대문화박물관, 2010
김재현, ‘나주 영동리고분 출토인골에 대한 형질학적 연구’, <나주 영동리고분군>, 동신대문화박물관, 2011
민나영·최지혜·하그바슈렌·고영종·최재성·한성훈·이광호, ‘백제시대 나주 영동리 고인골의 분자유전자학적 분석>, <나주 영동리고분군>, 2011
국립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3호분>, 2001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발굴조사보고서>, 2017
이규식·정용재·한성희·이명희·한면수·최동호, ‘출토 인골의 유전자분석-나주 복암리 3호분 옹관 인골을 중심으로’, <나주 복암리>(분석), 2001
오동선, ‘나주 복암리 정촌고분 1호석실의 매장의례와 금동신발의 특징’, <고대 동아시아의 금동신발과 금동관>(국제학술대회),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2019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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