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못 잊은 미국 백인·남성·저소득층… 트럼프 잘못은 다 잊었다
8년 전보다 고령·우경화… 더 뭉친 지지층
바이든 실정에 과오 가려… 허위에 마취
“불평등·탈진실 지속되면 영향력 그대로”
“여성의 생식기를 움켜쥘 수 있다는 미스터 트럼프(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이 담긴 녹음 파일.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천박한 폄하. 멕시코 국경에서의 부모·자식 분리. 허리케인 제동 목적 핵무기 사용 시사. 코로나19 환자에게 살균제를 주입해 보면 어떠냐는 권고.”
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그나마 사소한 것들이라며 추린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몰상식한 언행들이다. 그런 그가 지난 1월 21일 두 번째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지였던 뉴햄프셔주(州) 로체스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상식의 정당이다. 우리는 (이민자가 함부로 넘지 못하는) 국경을 원하고, 적은 세금을 원한다.” 그의 ‘팬덤(열광적 지지자 집단)’은 “우리는 트럼프를 원한다”고 화답했다.
그가 공화당 주별 경선이 대거 몰린 이날 ‘슈퍼 화요일’ 압승을 통해 후보로 지명되는 데 필요한 대의원을 거의 다 모았다. 세 번째 본선행이 목전이다. 공화당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뿐인가. 왜 다시 그인가.
기독교 민족주의
8년 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을 이끈 주력은 ‘성난(angry) 백인들’이었다. 지역 산업에 종사하던 '저학력 백인 남성 블루칼라(생산직 노동자) 유권자'는 이민 온 유색인종의 사회적 성장과 세계화에 따른 분업이 ‘미국의 주인’인 자신들의 입지를 줄인다고 여기며 분노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그들을 지지자로 포섭했다.
이번 공화당 경선에서 두드러진 것은 이들의 재결집이었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아이오와·뉴햄프셔·사우스캐롤라이나 등 첫 3대 주별 공화당 경선 출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 변화를 분석해 지난달 말 결과를 보도했다. 2016년 대선 당시 24%였던 65세 이상 비율이 36%로 늘었고, 자신의 정치 성향을 ‘매우 보수’라 밝힌 지지층도 20%포인트 늘어 과반(52%)이 됐다.
고령자·극우파와 함께 더 탄탄해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 토대는 백인 기독교도 집단이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공공종교연구소(PRRI)가 최근 공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낮고 나이 많은 백인에게서 ‘미국이 기독교 국가여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들과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층의 중첩도가 4년 전보다 더 높아졌다.
집단적 기억상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생명력이 ‘망각’과 ‘마취’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지난 2일 공표된 NYT·시에나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미국인들은 바이든 대통령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책에 훨씬 호의적이었다. ‘도움이 됐다’는 응답 비율이 18% 대 40%였다. 공화당 전략가 사라 롱웰은 현직인 바이든 대통령의 실정에 트럼프 전 대통령의 과오가 가린 측면이 있다고 NYT에 말했다. “바이든에 대해 싫어하는 점은 알고 있는 유권자가 트럼프에 대해 싫은 점은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NYT는 “당파 분열이 극심한 시대에는 공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도 합의된 집단 기억이 거의 없게 마련”이라고 전했다. 이는 얼마간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탈(脫)진실(포스트 트루스·post-truth)’ 전략이 주효한 결과다.
WP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3만573건의 허위 또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주장을 했다. 하루 평균 21건꼴이다. 벤저민 슈프먼 싱가포르 예일-NUS대 교수(정치학)는 한국일보 이메일 인터뷰에서 “거짓말로 가득한 공론장은 사람들이 진실을 냉소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앤드루 프랭크스 미국 워싱턴대 교수(정치심리학)는 NYT에 “트럼프에 대한 부정적 정보가 그저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처럼 돼 버렸다”고 개탄했다.
집단적 기억상실을 유도하는 양극화에는 선택적 노출과 확증 편향을 부추기는 소셜 미디어의 득세도 한몫했다는 게 전문가들 얘기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비판하는 대신 아예 거부하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우리는 위대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부활은 사법적 패배를 정치적 승리로 바꾼 연금술이었다. 지난해 3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처음 형사 사건(성추문 입막음)으로 기소되며 위기에 몰리는 듯했던 그는 오히려 이를 기회로 반전시켰다. ‘정치 탄압’ 프레임을 만들어 지지층을 결집하고 자금도 끌어모으며 독주를 시작했다. 기소가 2024년 대선 공화당 후보 지명 경쟁 판도를 바꿨다는 진단마저 나왔다.
저력의 원천은 ‘미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고립주의와 반(反)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1950년대 미국 경제 성장 황금기 재현과 기독교 중심 미국 전통 가치 수호 등을 추구하는 ‘트럼프주의(트럼피즘)’다. 여기에 주로 호응한 이는 소외된 저소득층 백인 남성이었다. 불평등 심화로 편안하게 돈을 버는 기득권 부유층을 보며 저소득 노동자들은 박탈감이 커졌다. 가부장제를 당연시하던 백인 남성은 성별에서든, 인종에서든 자신이 소수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감을 갖기 시작했다.
진보적 가치에 기독교가 흔들렸고, 중국이 부상하자 미국은 미국대로 위축됐다. 이들은 자신과 미국의 화양연화 시절이 그리웠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신의 팬덤을 ‘마가(MAGA)’라 부르는데, 대선 슬로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줄임말이다.
물론 TV리얼리티쇼 진행자 출신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눈높이 소통’ 능력도 팬덤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슈프먼 교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배태될 수 있는 구조적 토양이 남아 있고 트럼프 세력이 가짜 음모론을 퍼뜨릴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이 지속되는 한 트럼프는 계속 정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워싱턴= 권경성 특파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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