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균 칼럼] 트럼프를 다시 뽑겠다는 미국이 낯설고 두렵다
헌정 질서 짓밟았던 트럼프,
4년 만에 복귀 점점 현실화
닉슨, 도청 사건 무관했지만
은폐 축소만으로 ‘탄핵’ 몰려
‘그때 그 미국’ 어디로 갔나
중·고등학교 시절 월요일마다 운동장에서 조례가 열렸다. 강단 앞 학생이 “기준”을 외치면 그 학생 위치에 맞춰 전교생이 오와 열을 맞췄다. 정글 같은 국제사회 속에서 기준 역할을 해온 나라가 미국이었다. 미국이 정하는 입장이 자유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의 표준 답안이었다. 각국 사정에 따라 미세 조정하는 정도였다. 반대 진영 국가들도 미국의 동향에 맞춰 대항 좌표와 수위를 저울질했다.
필자가 워싱턴에 부임했던 1994년의 미국은 탈냉전 직후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이었다. 국제 질서뿐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롤 모델이었다. 한국의 후진적인 정치 문화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대비되는 미국 사례를 송고하는 게 워싱턴 특파원의 업무였다. 심지어 성수대교가 붕괴됐을 때도 “이런 대형 참사 때 미국 같은 나라는…” 식의 기사를 주문받았다.
30년이 흐른 요즘의 미국은 더 이상 국제사회의 나침반이 아니다. 2016년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했고, 2024년 그를 다시 맞을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 임기 내내 하루 평균 15번씩 거짓말을 하는 나라에서 무슨 리더십을 배우겠는가. 코로나 환자에게 소독제를 주사해 보자는 황당한 처방을 하면서 어떻게 국제사회 방역을 지휘하겠나. 나토 동맹국들이 국방비 부담을 안하면 러시아 침략을 부추기겠다는 사람에게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맡길 수는 없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런 막말엔 이제 이력이 났고 사실 본질적인 문제도 아니다. 미국 국익만 잘 챙기면 되지 무슨 상관이냐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반박에 달리 할 말도 없다.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의 마지막 상대로 남은 니키 헤일리는 “트럼프가 후보로 확정되면 지지할 것이냐”는 질문에 확답을 내놓지 않았다. 경선 불복 아니냐는 추궁에 헤일리는 “트럼프가 미국 헌법을 준수할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트럼프는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다.
4년 전 미 대선 개표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같은 공화당 소속 조지아주 국무장관에게 개표 조작을 주문했다. “재검표를 해라. 나를 찍은 1만1780표를 새로 찾아내라”는 녹취록이 공개됐다. 민주당 바이든 후보에게 1만1779표 차로 패배한 조지아주 선거를 1표 차로 뒤집으라는 뜻이다. 접전지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 공화당 간부들에게도 마찬가지 요구를 했다.
개표 조작에 실패하고 패배가 확정되자 트럼프는 펜스 부통령에게 “대선 결과를 승인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펜스가 의장을 맡게 될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대선 승자를 확정짓는 의사봉을 두드리지 않으면 정권을 지킬 수 있다는 황당한 발상이었다. 펜스는 “그럴 권한이 없다”고 거부했다. 트럼프는 마지막 수단으로 열성 지지자들을 선동했고 그 결과 2021년 1월 6일 의사당 난동이 벌어졌다.
트럼프는 자신의 대선 패배를 세 단계에 걸쳐 뒤집으려 했다. 명백한 헌정 유린 시도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미국은 그런 ‘전과자’를 다시 대통령에 앉히려 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사임하게 된 단초는 공화당 선거 공작팀이 워터게이트 빌딩의 민주당 본부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 했던 사건이었다. 닉슨이 직접 지시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다만 그 파장을 축소 은폐하는 과정에 개입하면서 점점 수렁에 빠져들었다. 하원이 탄핵을 가결하고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도 등을 돌리자 스스로 물러났다. 트럼프가 직접 주도한 개표 부정 및 선거 불복에 비하면 그야말로 경미한 사안이었다. 그런 닉슨을 몰아냈던 50년 전 미국이라면 트럼프는 재기를 꿈도 못 꿨을 것이다.
현재 야당인 미국 공화당 1인자인 미치 매코널 상원 원내대표는 올 11월 대선이 끝나면 자리를 내놓겠다고 했다. 트럼프 2기가 개막될 때 매코널 원내대표는 그 짝이 될 수 없다는 지지층의 압박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대선을 도둑맞았다”는 트럼프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의사당 난동에 “트럼프가 실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었기 때문이다.
현실로 다가오는 트럼프 귀환에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한다는 전문가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윤석열·트럼프 조합이 의외로 찰떡궁합일 수 있다는 전망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선 트럼프를 다시 뽑겠다는 미국 국민의 결심이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헌법을 짓밟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다시 맞아들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국가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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