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노벨상’ 최다 배출 일본… 미국 제치고 1위 오른 저력은?

채민기 기자 2024. 3. 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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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에 야마모토 리켄 선정
내부가 들여다보이도록 설계한 요코스카 미술관. 야마모토 리켄이 여러 작품을 통해 추구해 온 투명성은 사용자는 물론 외부의 관찰자에게도 건축의 개방성을 환기한다. 요코스카 미술관은 전시 공간 대부분을 지하에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서 관람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도 휴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오하시 도미오

‘건축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올해 수상자로 일본의 야마모토 리켄(79·山本理顯)을 선정했다고 미국 하얏트 재단이 5일(현지 시각) 밝혔다. 이로써 일본은 1979년 이 상이 제정된 이래 가장 많은 수상자(9명)를 배출한 국가가 됐다. 수상 횟수는 8회로 미국과 같지만, 2010년 2인 공동 수상이 포함돼 있어 수상자는 1명이 더 많다. 한국인 수상자는 아직 없다.

야마모토는 사생활만 중시해 밀실이 되어가는 건축을 비판하며 공동체의 교류를 강조해왔다. 심사위원회는 “자유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해체하고 주택을 이웃과 단절된 상품으로 전락시킨 조건을 거부한다”며 “조화로운 사회를 위해 공적·사적 영역의 유대를 구축하는 건축가이자 사회 운동가”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그래픽=정인성

◇공동체의 교류를 추구한 건축가

야마모토는 “나에게 공간을 인식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 건축의 접근 방식은 사생활을 강조한 나머지 사회적 관계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공간 안에서 삶과 문화의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 이처럼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지역사회권(圈)이라는 용어로 개념화했다.

그가 설계한 경기 판교의 타운하우스와 서울 세곡동 아파트는 이런 생각을 실현한 작품들이다. 판교에서는 주민들이 공유하는 정원 주위에 각 세대를 배치하면서 현관 벽에 유리를 사용했다. 세곡동 아파트 역시 현관문을 유리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국내에서 사생활 침해 논란을 빚었고, 판교 타운하우스는 초기 미분양을 기록하기도 했다.

공동 정원 주변 각 세대의 현관 부분을 유리로 설계한 ‘판교 하우징’. 소통을 강조한 디자인이지만 사생활 침해 논란을 낳기도 했다. /사타케 코이치

1945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일본 요코하마로 이사했다. 1968년 니혼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73년 자신의 설계 사무소인 ‘리켄 야마모토&필드 숍’을 설립했다. 이후 50여 년에 걸쳐 일본은 물론 스위스, 중국, 한국 등지에서 작품을 설계하며 투명성과 공공성을 중요한 어휘로 삼았다. 예컨대 히로시마 니시 소방서(2000)는 건물을 투명하게 만들어 안전의 파수꾼인 소방관들의 활동을 드러내고, 방문자들이 건물 곳곳의 공공 구역에서 소방관들과 마주칠 수 있도록 했다. 요코스카 미술관(2006)은 관람객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전망대 등에서 도쿄만 일대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쉼터로 디자인했다.

◇디자인만 아닌 시공 능력 평가

건축계에서는 수상자 개인의 역량을 포함한 일본 건축 전체의 저력이 ‘최다 수상’의 바탕이 됐다고 본다. 프리츠커상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제로 지어진 작품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수상자를 결정한다. 여기에는 디자인뿐 아니라 시공 능력, 자본, 관련 법규와 같은 건축 문화가 총체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KAIST 인문사회과학부 조현정 교수는 “일본은 1960년대부터 ‘일본성(性)’을 내세워 국제 건축계에서 영역을 구축했고, 그때부터 ‘아시아’나 ‘지역’ 딱지를 떼고 국제 수준의 건축으로 대접받았다”고 말했다. 일본 첫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단게 겐조가 패전 이후 국가 재건 프로젝트를 수행했던 도쿄대학 연구소가 이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 교수는 저서 ‘전후 일본 건축’(마티)에서 단게 연구소를 ‘전후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를 설계하는 싱크탱크’이자 ‘이소자키 아라타, 구로카와 기쇼, 마키 후미히코 등 재능 있는 건축가들이 모여드는 사관학교’로 표현했다. 이 중 단게 본인과 이소자키, 마키가 프리츠커상을 받았고 이소자키와 마키는 초창기 프리츠커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일본 건축의 연구소 문화는 단게의 시대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 교수는 “일본 건축가들은 유학을 떠나기보다 대학별 연구소에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경험을 쌓는 경우가 많다”면서 “해외에 나가서 비슷비슷한 고민을 하기보다 일본 사회를 깊이 탐구하면서 노하우를 전수하는 쪽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도 비결로 거론된다. 서울대 건축학과 서현 교수는 “일본은 현대 이전부터 ‘완성도’에 대한 집착이 엄청나게 강했던 사회”라면서 “지금도 건축가가 아이디어를 내면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자들이 그걸 구현할 방법을 줄줄이 제시하면서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번영을 누리면서 설계는 물론 시공이나 재료 등에 충분한 비용을 투자할 수 있었던 점, 패전 이후에도 많은 건축 잡지가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건축가들에게 공론장을 열어준 점도 성공 비결로 꼽힌다. 단독주택 중심의 주거 문화 덕에 젊은 건축가들이 일찍부터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점도 아파트 위주의 한국에 비해 유리한 점으로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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