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창비부산’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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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과 위수령의 시대인 1966년 1월 15일.
출판사 창비가 독자와 만나는 공간 '창비부산'을 개관한 지 벌써 3주년이다.
'대형마트가 구멍가게까지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창비부산은 문화사랑방으로 뿌리 내렸다.
창비가 부산을 선택한 이유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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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과 위수령의 시대인 1966년 1월 15일.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 논쟁적 글쓰기를 표방한 문학계 이단아가 탄생했다. 스물여덟 문학평론가 백낙청이 주도한 계간지 ‘창작과 비평’(창비)이다. 백낙청은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에서 순수문학을 비판하면서 ‘참여’를 강조했다. “문학 하는 자세를 바로잡으려 할 때 문학의 순수성을 새로 문제 삼을 필요가 있다.” 그에게 문학은 어둠에 가려진 진실을 드러내는 도구였다. 삶의 현장에 문학이 함께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호철의 소설 ‘고여 있는 바닥-어느 이발소에서’를 통해 권력기관을 조롱할 만큼 창비 창간호의 배짱은 두둑했다. 군부독재의 서슬이 시퍼런 1970년대 판매부수 2만 부를 기록한 것은 진보 담론에 대한 당대 지식인들의 목마름이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
반유신의 중심이던 창비는 숱한 판매금지와 필화에 휘말렸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폐간되는 아픔도 겪었으나 오뚝이처럼 일어섰다. 비판과 성찰을 통해 암울한 현실에 전망의 주춧돌을 놓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창비와 함께 한 문학인은 요산 김정한 선생부터 황석영 김수영 신동엽 김지하 김남주 신경림 리영희 강만길까지 헤아릴 수 없다. 그 시절 창비가 없었다면 우리 문학사에 얼마나 큰 공백이 생겼을까. 최근 300쇄를 찍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맨부커상 수상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도 창비에 처음 소개됐다.
출판사 창비가 독자와 만나는 공간 ‘창비부산’을 개관한 지 벌써 3주년이다. ‘대형마트가 구멍가게까지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달리 창비부산은 문화사랑방으로 뿌리 내렸다. 매년 100여 개 모임이 300회 넘게 이곳을 이용한다. 작가 초청 강연은 물론 편집자학교부터 평론가와 함께 하는 서평쓰기까지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창비가 부산을 선택한 이유가 재미있다. 수도권을 제외하고 창비 독자가 가장 많다는 게 첫째 이유. 둘째는 지역 작가 활동이 활발해서다. 창비부산이 1927년 준공한 옛 백제병원에 터를 잡은 것도 ‘신의 한 수’다. 근대유산과 출판계 아이콘의 결합은 매년 관광객 3만 명을 끌어들인다.
반세기 넘게 ‘돈 안 되는’ 계간지를 발행하는 창비의 수고는 박수받을 일이다. 문학의 퇴조와 반교양이 판치는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상업주의에 물든 책만 베스트셀러가 되는 세태에 창비의 존재는 더 소중하다. 민주와 저항을 넘어 지역에 문화의 씨앗을 뿌리려는 창비의 도전을 응원한다.
이노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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