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K뷰티 ‘중소기업 신화’에는 이 法이 있었다

이인열 기자 2024. 3.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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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서 문제 발생하면
제조업체 넘어 유통사도 책임
규제 법령 한 줄 바꾸자
10년 만에 中企 0→2만2716곳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정다운

한국 화장품 산업의 시작은 미약했다. 태평양화학공업(1945년·현 아모레퍼시픽), 락희화학공업(1947년·현 LG생활건강) 등이 크림, 화장비누 등을 생산하며 산업의 기틀을 닦았다. 기술력이 부족하니 프랑스, 미국, 독일 등의 선진 기업들과 제휴해야 했다. 지금 눈높이로 보면 부족하기 짝이 없는 상품으로 내수 시장의 일부라도 막아주던 한국 화장품 기업들은 1993년 유통시장 완전 개방으로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우리 화장품 기업의 젖줄이던 랑콤, 시세이도, 에스티로더 등 제휴사들이 일제히 한국에 직접 법인을 세워 진출했다. 그 무렵 한국 화장품 산업 저변이 취약했던 것은 자본력, 기술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에도 법과 규제가 산업의 발목을 잡기는 매한가지였다. 화장품에 대해선 인체에 직접 사용하는 ‘특수성’을 내세워 엄청난 규제들이 있었고, 그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문제 발생 시 모든 책임을 제조업체가 지도록 한 조항이었다. 유통 과정에서라도 화장품에 문제가 생기면 제조업체가 망하기 딱 좋은데, 누가 도전을 꿈꾸겠는가. 상품 기획에서부터 제조, 유통을 모두 관리할 수 있는 해외 브랜드와 국내 일부 대기업만이 화장품 산업을 한 이유다.

그런 한국이 이제 ‘K뷰티’를 수출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그런데 K뷰티 수출액 중 80%가 국내 중소기업의 성과란 걸, 또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어떤 ‘좋은 법’ 때문이란 걸 아는 사람은 드물다.

K뷰티 수출액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20~30% 증가해, 지난해 자동차와 플라스틱을 제치고 중소기업 수출 1위 업종으로 올라섰다. 중국의 ‘변심’으로 최근 3~4년 동안 아모레퍼시픽, LG생활건강 등 화장품 대기업의 매출액이 4조원 가까이 감소한 것과 대조된다. 그 전환점이 2012년 화장품법 개정이었다. 화장품 문제 발생 시 책임의 대부분을 제조업체가 아닌 유통 업체 등도 지게 한 게 골자다. 그러자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획력만 있다면 누구든 화장품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제조자개발생산(ODM) 기업과 손잡고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됐다. K뷰티 중소기업 출현이 가능케 된 것이다. 유통업체들은 꼼꼼한 관리로 생산자들의 아이디어는 살리되 품질을 보증할 수 있었다. 법 개정 이후 국내 화장품 업계에서 중소기업(책임판매업체) 숫자는 2012년 0곳에서 2021년 2만2716곳으로 급증했다. 이 법 개정으로 자금력이나 마케팅력이 부족한 중소기업과 신생 브랜드들은 천군만마를 얻게 됐다. 외국 관광객 사이에 ‘K뷰티 성지’로 불리는 올리브영에서 판매하는 상품 10개 중 8개가 국내 중소 브랜드다. 온라인 채널은 말할 것도 없다. 만약 ‘화장품은 인체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도그마에 빠진 정치인들이 끝까지 중소기업들의 화장품 진출을 사실상 막는 법을 고수했다면 K뷰티 신화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좋은 법의 힘이란 이렇게 놀라운 것이다.

지금도 중대재해처벌법 같은 중소기업의 존망이 걸린 법들은 정치인이란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 법의 폐해를 아무리 읍소해도 ‘노동자의 생명 중시’란 도그마에 빠진 일부 정치인들은 귀를 막는다. 법 조항 몇 줄 바꾸어 산업을 바꾼 사례는 더 있을 것이다. 그 반대도 많을 것이다. 다가오는 총선에서 나쁜 법 , 이상한 법이 아닌 좋은 법 많이 만들 사람 뽑는 게 정치 혁신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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