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105분 동안 외국인이 되고 싶었다...‘패스트 라이브즈’의 예상치 못한 장벽

백수진 기자 2024. 3.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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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49번째 레터는 6일 개봉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입니다.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으로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오르며 주목을 받았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까지 최근 본 영화 중 가장 좋았다며 극찬해 많은 분들이 기대하고 계실 텐데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영화는 뉴욕의 바에 앉아있는 세 사람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동양인 남자와 여자, 그리고 백인 남자. 건너편에 앉아있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세 사람이 어떤 관계일지 추측합니다. 동양인 남녀가 커플이고 백인 남자는 친구일까. 아니면 동양인 부부 관광객과 백인 가이드일까. 세 사람을 잇는 수많은 경우의 수와 가능성을 상상하게 하며 영화가 시작됩니다.

저는 지난해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패스트 라이브즈’를 처음 봤는데요. 당시에도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고, ‘미나리’’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등을 제작한 A24의 로맨스 영화라니 기대가 컸습니다. 매혹적인 오프닝과 함께 영화 속으로 빠져 들어가던 찰나에 토종 한국인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이 나타났습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어색하게 들리는 한국어 대사들 때문이었습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영화는 12살에 캐나다에 이민을 간 나영(그레타 리)이 어린 시절의 첫사랑 해성(유태오)과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애틋한 로맨스를 그립니다. 그런데 이민 간 지 오래된 나영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해성까지 파파고 번역기처럼 대화를 나눕니다. “(처음 만난 장면에서) 와~ 너다!” ”한국말이 좀 녹슬었는데(rusty)?“ ”언제쯤 나를 만나러 뉴욕에 오는 게 가능해?” 한국어를 못 알아듣고 자막으로 영화를 볼 외국인들이 부러워졌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CJ ENM과 A24가 공동 투자 배급한 영화입니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레타 리는 ‘기생충’ 통역가로 활약했던 샤론 최의 특훈을 받아가며 한국어를 준비했고, 독일에서 태어나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유태오 배우 역시 한국어 어휘나 뉘앙스를 세심하게 고민해가며 연기했다고 합니다. 셀린 송 감독이 쓴 대본도 한국인 검수를 받고 수정을 거쳤다고 하네요. 그럼에도 결과물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한국보다는 세계의 관객을 대상으로 만든 영화라는 점이 여실히 느껴집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CJ ENM

개봉을 앞두고 최근 열린 시사회에선 “나는 외국인이다. 나는 한국어를 모른다” 최면을 걸고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나영이 한국어로 꾸는 꿈마저 이해하고 싶은 남편과의 대화 장면이나 나영과 해성이 24년 만에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하는 엔딩 장면 등 섬세하게 연출된 아름다운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수많은 시공간을 거치면서 살아가는 이민자와 같다는 감독의 통찰도 빛납니다. 한국 관객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두 번은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예상치 못했던 장벽에 부딪히긴 했지만, 오히려 끝나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드는 영화였습니다. 스쳐 지나온 수많은 인연과 가지 못했던 길들을 떠올리게 하면서 오랜 여운을 남깁니다. 여러 나라에서 이 영화가 공감을 일으킨 이유겠지요.

개인적인 감상과 별개로, 저 역시 한국인으로서 10일(현지 시각)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패스트 라이브즈’의 수상을 응원해봅니다. 셀린 송 감독의 인터뷰는 이 기사에서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그럼, 저는 다음 레터에서 뵙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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