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타워] 130년 전 청일전쟁과 일그러진 언론

김용출 2024. 3. 6.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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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으로 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안성나루의 전투에서 나팔수 병사 한 명은 진군나팔을 불며 적의 탄환에 죽었는데 죽어서도 관을 입에서 놓지 않았고, 상등병 한 명은 연군을 두 명 찔러 죽이고 자신 또한 청국 병사의 총검에 찔려 길가에서 죽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운명을 가른 청일전쟁 당시 안성천 전투에서 숨진 일본 육군 제21연대 소속 나팔수 시라카미 겐지로는 1984년 8월9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이 같은 기사로부터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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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전쟁 나팔수, 지금의 현실은 달라졌을까

“두 명으로 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안성나루의 전투에서 나팔수 병사 한 명은 진군나팔을 불며 적의 탄환에 죽었는데 죽어서도 관을 입에서 놓지 않았고, 상등병 한 명은 연군을 두 명 찔러 죽이고 자신 또한 청국 병사의 총검에 찔려 길가에서 죽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운명을 가른 청일전쟁 당시 안성천 전투에서 숨진 일본 육군 제21연대 소속 나팔수 시라카미 겐지로는 1984년 8월9일자 ‘도쿄니치니치신문’의 이 같은 기사로부터 영웅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언론들은 이후 경쟁하듯 관련 보도를 쏟아냈고, 심지어 한 신문은 의연금 모금 광고를 수차례 게재하기도 했다. 시라카미는 이를 통해서 선두에서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진군나팔을 입에서 떼지 않은 ‘안성 진격의 나팔 병졸’로 신화화됐다. 심지어 일본 국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 연구자들에 의해서 시라카미는 전투 자체가 아닌 전투를 위해서 안성천을 건너려다가 익사한 것으로 드러났고, 심지어 전투 당시 나팔을 불었던 병사는 그가 아닌 기구치 고헤이였다는 것도 1년 뒤에 밝혀지기도 했다.

130년 전 일본은 청일전쟁을 겨냥하고 8000명 규모의 혼성여단을 조선에 급파했다. 이때 일본의 많은 신문사 역시 대규모 특파원 또는 통신원을 파견했다. 당시 육군 종군기자는 ‘아사히신문’이 16명의 특파원을 파견하는 등 최소 66개사 114명 이상이었다.

이들 종군기자는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 동향, 조선의 사정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면서 일본 제국의 나팔수로서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위행위로 미화하고 대조선 지배정책에 앞장섰다.

동학농민운동 발발에 따라서 조선 정부가 중국에 출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중국과의 톈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해 전쟁이 시작됐다고 강조하는 방식으로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은폐했고,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전쟁’으로 규정해 정당화했다. 일본군이 뤼순을 점령한 뒤 자행한 학살의 진상을 보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학살을 주장한 서양인들을 되레 위협했다. “우리들은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경계함과 동시에 금후에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살육을 행해 조금도 차이 없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지지신보’ 12월14일자)

아울러 조선의 사정과 문제를 리얼하게 대내외에 알리기도 했지만 “조선의 문명사업을 도와야 한다”며 조선을 멸시하는 배외적인 충군애국주의로 일관했다. 정작 조선 정부가 일본군 철수를 요구했고 동학농민군이 청·일 양군에 철병을 요구하며 저항했으며 일본군이 이들을 철저히 진압했다는 사실은 애써 생략하거나 축소했다.

최근 리뷰를 위해서 읽었던 책 가운데 조재곤 서강대 교수의 ‘조선인들의 청일전쟁’(푸른역사)은 단연 인상적이었다. 남의 나라 간 전쟁이라고 해서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던 청일전쟁의 내용과 의미를 다시 일깨워주었거니와, 무엇보다 130년 전 일본 언론의 민낯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놀란 마음은 작금의 우리 언론과 흐릿하게 대비되면서 안타까움으로 바뀌었다. 서로 진영으로 갈려 정치적 내전을 치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과연 신문과 기자 윤리와 책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좋아하는 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시의 “절대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조작해선 안 된다”는 말보다 당시 ‘도쿄아사히신문’의 특파원 요코자와 지로의 다음 말이 더 아프다. “입을 다물고 붓을 급히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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