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향노의 자화상
“ㄱ ㄴ ㄷ/ ㅏ ㅑ ㅓ ㅕ/ 처음 보는 글자/ 가 갸 거 겨/ 가지/ 고구마/ 글자 겨우 아니/ 하하 호호/ 로 료 브 비/ 글자가 비료지.”
19세에 충북 괴산 산골에 시집와서 평생 농사일을 해온 78세의 안대순 할머니가 쓴 글이다. 추영자 할머니는 괴산에 시집오던 날의 감회를 “앞에도 산 뒤에도 산/ 산만 보여/ 도망도 못 가네”라고 적었다. 진달래반 정희 할머니는 “엄마 산소에 있는 열매를 먹으면/ 젖맛이 났다”고 회상한다. 한때 빛나는 이팔청춘이었던 할머니들은 이제 괴산두레학교에서 벗들과 함께 한글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시화집 <얘들아 걱정 마라, 내 인생 내가 산다>(삼인)는 2009년부터 성인문해교육을 해온 괴산두레학교(대표 김언수)가 2014년부터 10년 동안 어르신들이 쓰고 그린 시화를 엮은 책이다. 해마다 할머니들의 시화를 모아 달력을 만들어 보급했다. 60대 후반에서 90세가 넘은 일흔아홉 분의 할머니들, 네 분의 할아버지들이 쓰고 그린 121편의 시화를 한데 엮었다. 표제작을 쓴 84세 윤영자 할머니는 “얘들아 걱정 마라/ 잔소리 하지 마라/ 내 걱정 하지 마라/ 엄마는 하고 싶다/ 이제는 하고 싶다/ 내 인생 내가 산다/ 사는 데까지 살다 갈란다”라고 썼다.
‘내 인생 내가 산다’는 할머니의 선언이 눈에 띈다. 어쩌면 할머니의 선언은 나이가 들수록 더 중요해지는 ‘인생 문해력’을 강조한 말이 아닐까 한다. 사회학자 김찬호는 <베이비부머가 노년이 되었습니다>(서해문집)에서 “자기를 상대화하면서 보편적인 관점으로 나아가고, 사물의 근본을 캐묻는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인생 문해력을 높여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상에 충실하되, 보이지 않는 세계의 문을 두드려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몽테뉴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른 공기를 마시는 희열’이 필요하다고 해야 할까.
괴산 할머니들의 글을 읽으며 “글자가 비료지”라는 표현에서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이른바 배웠다는 ‘먹물’ 시인들의 작품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표현들이 사금파리처럼 박혀 있다. 수년 전 경북 칠곡 할매들이 쓴 시집 <시가 뭐고?>(삶창, 2015) 편집에 참여하면서 박차남 할매가 쓴 “깨가 아주 잘났다”라는 표현을 접하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척박한 땅을 살리는 데는 녹비(綠肥)가 필요하듯이, 괴산 할머니들에게 괴산두레학교는 ‘글자가 비료’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귀한 배움터가 되었다.
괴산두레학교와 이런저런 인연으로 책에 추천사 몇마디를 보탰다. “지난 십년의 시화를 묶은 이 시화집에는 나이 듦에 저항하려는 항노(抗老)의 태도 따위는 없다. 나이 듦을 수용하고 긍정하려는 향노(向老)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화집은 나이 듦의 향기를 뜻하는 ‘향노(香老)의 자화상’이라고 부르고 싶다. ‘공책을 사가지고/ 나올 때는/ 행복합니다’(전영순)라고 말하는 괴산두레학교 할머니들이 있는 한, 그 땅은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3월6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인사동 아르떼숲에서 ‘내생내산 원화전시회’가 열린다. 말이 갈수록 거칠어지는 정치의 계절, 할머니들이 쓰고 그린 시화의 ‘연약한 말들’을 보며 나를 나이게 하는 자기 해방의 서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생각한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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