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오늘]퍼져라, 동네책방 ‘삶의 향’
최은영의 단편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에는 ‘영인문고’라는 중고책방이 등장한다. “천장까지 이어지는 책장이 책방의 삼면에 자리했고, 가운데에는 기다란 평대”가 있는,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런 중고책방(사실 ‘헌책방’이라는 표현이 더 정겹기는 하다) 모습이다. 화자(話者) 희원과 대학교 영어강사인 그녀가 거기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곳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일종의 정서적 연대감 같은 것을 경험한다. 서점, 책방 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에 가는 일을 즐거워하는 내게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희원이 “계산대에 가만히 앉아서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신경쓰지 않던” 책방 주인 덕분에 “책방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고백이었다. 그 어떤 책도 권하지 않는 그곳에서 희원과 그녀는 오히려 책이라는 세계에 더 빠져들었을 것이다.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의 주인공 영주에게 서점을 연 후 몇달간은 “겨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인 정지된 시간이었다. “서점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직진하다가 찾아온, 일종의 번아웃이었다. 영주는 문만 열어놓았을 뿐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정집들 사이에 있는 터라 동네 사람들이 이따금 찾아들었지만 “몸속에 피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는 사람처럼 하얗게 앉아 있는” 영주를 보고는 발길을 끊었다. “예쁜 얼굴에 화려하게 차려입길 좋아하는” 민철 엄마가 그런 영주에게 한마디 한다. “으이그, 동네에 서점이 생겼다고 다들 얼마나 좋아하는 줄 알아?”
영주는 그제야 반만 차 있던 책장에 책을 채워 넣고, 바리스타도 채용한다. 휴남동 서점은 동네 사람들에게 그렇게 숨통 트이는 시간을 선사하는 공간으로 조금씩 변모해간다. “하루 중 이 시간만 확보하면 그런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우리 인간은 복잡하게 만들어졌지만 어느 면에선 꽤 단순해. 이런 시간만 있으면 돼. 숨통 트이는 시간. 하루에 10분이라도, 한 시간이라도. 아, 살아 있어서 이런 기분을 맛보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시간.”
광화문이든, 강남이든 번화가에 갈 일이 생기면 최종 코스는 늘 서점이다. 그런데 영인문고처럼 손님이 오는지 가는지 신경쓰지 않는 주인도 없건만, 대형 서점들은 입구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대개의 서점은 입구에 저자의 얼굴과 커다란 카피를 내건 채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면서 몇몇 책들을 경쟁시킨다. 매대의 비용은 모두 출판사 부담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온라인 서점도 마찬가지다. 화면을 열면 ‘편집장의 선택’ ‘베스트 예감’ ‘핫이슈’ ‘요즘 이 책’ 등등의 이름으로 몇몇 책들만 오롯하게 강조한다. 이 비용 역시 출판사 부담이다.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책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것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일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요즘 서점들은 몇몇 책만을 강조, 아니 강요한다. 누군가에게는 어떤 책을 권해주는 일이 언제나 필요하겠다. 하지만 마음에 담아둘 책은 무수한 책들 사이에서 방황하며, 때론 길을 잃기도 해야 겨우 찾아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휴남동 서점 같은 동네 책방들이 곳곳에서 제 역할을 해주고 있어 반갑다. 규모가 작다 보니 한정된 책을, 하여 주인장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책들이 놓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동네 사람들의 말길이 트이고, 정을 나누고, 누군가는 마음의 치유를 얻는다. 마음에 담을 책도 한 권 찾게 된다. 우리네 삶의 실핏줄 같은 동네 책방들이, 그리고 모든 서점이 그런 공간이기를 오늘도 꿈꾼다.
장동석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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