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재산 쓸 곳에 썼다", 인창의숙 설립자 손창원의 기부 이유

2024. 3. 6.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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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어려서 부모 잃고 혼자 힘으로 큰 富 이뤄 공익 위해 돈·토지 쓰라는 부인 유언 실행 학교 2개와 보육원 설립해 사회공헌 앞장 눈 앞 사익 버리고 민족교육 새 지평 열어

많을수록 좋다는 다다익선(多多益善)이란 말이 있다.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도 있다. 세상에는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오히려 탈이 되는 것인가 보다. 재물도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복(福)이 되기도, 화(禍)가 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재물이다. 100년 전 그 재물을 제대로 쓴 사람이 있었다. 인창의숙(현 인창고) 설립자 성암(誠庵) 손창원(孫昌源)이다.

1924년 3월 5일자 매일신보에 '부인의 유언으로 30만원 거재(巨財)를 기부'라는 제목으로 거부(巨富) 손창원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시내 관수동 부호 손창원 씨는 65세의 노령(老齡)으로 지난 2월 29일 오후 10시에 그 부인 나주(羅州) 임씨(林氏)의 상배(喪配)를 당하였는 바, 손씨는 그 부인의 유언에 의하여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자기의 전 재산을 반분(半分)하여 공익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한다. 원래 손씨는 자선심이 풍부한 사람으로 우리 사회에 훌륭한 사업을 많이 일으켰음은 세상이 다 아는 바어니와, 그중에도 시내 청진동에 있는 사립 삼흥(三興)보통학교와 동소문 밖 사립 인창(仁昌)학교 등은 훌륭한 실례(實例)이다. 삼흥학교는 1899년에 설립하여 설립 당초부터 손씨는 자기의 재산 중에서 거대한 투자를 하였으며, 그 후로도 매년 수천 원을 담당하여 현 교장 백완혁(白完爀)씨와 보조를 같이 하여 경영해 왔고, 더구나 연전부터 조선 아동의 향학열이 발발(勃發)함을 따라 삼흥보통학교의 교사(校舍)가 협착함을 안 손씨는 다시 자기의 재산으로 신축함에 힘을 썼다. (중략) 또 재작년 봄에도 동소문 밖에 사립 인창학교를 자기의 독담(獨擔)으로 수천 금을 내어 설립하여 현재 수 백의 영재를 길러내는 중이며, 서대문 밖 보육원에도 무수한 금전을 증여하여 무의무탁(無依無托)한 고아들을 구제해 왔음도 역시 사실인데, 이에 대하여 이번에 작고(作故)하였다는 그 부인 임씨의 어진 내조가 없지 아니 하였다. (중략) 생전에 더욱 육영사업을 완전히 하리라 하여, 자기의 소유 재산 중에서 1,500석 가량의 추수가 있는 전답과 기타 집터, 임야 등 거의 50만평 시가 30만원의 거재(巨財)를 나누게 되었다."

30만원이라면 얼마나 될까? 당시 낙원관(樂園館)이란 식당의 광고에 냉면 한 그릇에 20전이었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대충 냉면 150만 그릇이다. 따라서 최소한 150억원 이상의 큰 금액이다.

같은 날 매일신보는 이런 손창원의 기부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감상을 썼다. "손창원(孫昌源)씨는 일전에 상처(喪妻)를 한 후 인생은 허무하다는 감각과 그 부인의 유언에 의지함이라고, 인생이 허무하다고 그랬든지 부인의 유언을 어기지 못하여 그리 하였든지, 하여간 손씨는 재산을 가히 쓸 곳에 썼다 하겠고 교육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깊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의 수전노(守錢奴)들도 손씨의 장한 행실을 본받아 지하에 돌아가서라도 손씨 부인 보기에 부끄럼이 없도록 함이 어떠할는지. (후략)"

다음 날인 3월 6일자 동아일보는 '재물(財物)의 삼난(三難)'이란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경성 관수동에 사는 손창원(孫昌源)씨는 자기의 전 재산 3천여 석 받는 것을 반분하여 사회 사업에 쓰리고 하고, 우선 고양군에 있는 인창(仁昌)학교, 시내 청진동에 있는 삼흥(三興)학교, 서대문 밖 보육원 등 세 곳에 각각 다액의 금전과 토지를 기부하였다 한다. 우리는 이 소식을 들을 때에 재물의 세 가지 어려움을 생각지 아니 할 수 없다. 첫째는 잘 모으기가 어렵고, 둘째는 잘 지키기가 어렵고, 셋째는 잘 쓰기가 어렵다 함은 고래로 전해오는 재물에 대한 진리이다. (중략) 전 조선에 있는 부자라 하는 이름을 듣는 인사여, 우리의 의견이 어떠한가. 그대들이 이 손씨(孫氏)의 행동을 어떠하다 생각하는가."

이런 재물로 인해 벌어진 미담(美談)도 많지만 그로 인한 끔찍한 일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1924년 2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돈으로 하여금 이러한 강상(綱常)의 변(變)'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임학만(林學萬)이라는 자는 나이 지금 26세인데 홀로 된 모친이 돈을 잘 주지 아니 한다 하여 그 어미를 죽이고 경성형무소에서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이라 한다. 그러한데 섭정궁 전하 가례(嘉禮)에 감형이 되지 아니 함을 비관하고 지난 2월 9일 밤 새벽 4시경에 간수의 눈을 피하여 손을 묶은 수갑과 창살을 이용하여 자살을 하였다 한다. 이것은 아무리 악독한 놈이라도 어미를 죽이고야 어찌 살기를 바라리요. 그 비관하였다는 것은 비관한 것이 아니라 천리(天理)가 소연(所然)하여 천벌을 받은 것이니라. 이를 보면 돈으로 하여금 이러한 강상(綱常)의 변(變)이 있다. 이왕 몇십 년 전에는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이러한 변괴가 없더니 지금은 어찌 된 까닭인지 돈이 많은 집에서 이러한 일이 간혹 생기는 모양이니 돈 있는 자들은 시대와 인심을 참작하여 한 번 생각할 일이다."

고이면 썩는 게 물만은 아닌가 보다. 1924년 2월 17일자 조선일보 칼럼은 이것을 대변하고 있다. "금전이란 모이거든 당연히 쓸데는 써야만 하는 게 아니냐 말이다. 대대손손이 유전하며 자기 일가족만 만족한 생활로 호의호식만 하고 지내면 제일로 알지 마는 도저히 그런 게 아니다. 좋은 재산을 가지고 교육이나 공익이나 자선이나 이 세 가지에 한 가지도 사업을 못 할 바에는 한 수전노(守錢奴)에 지나지 못한 게 아닐까."

이후 1926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에 손창원 서거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재산을 이룬 후 공익 사업에 힘쓰던 손창원은 1926년 4월 17일 오후 5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인창고등학교는 1922년 개교 이래 지금까지 2만9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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