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면 넓어지는 세상
[똑똑! 한국사회] 유지민 | 서울 문정고 2학년
지난 1월, 생애 처음 해외에서 보름 넘게 홀로 여행했다. 보호자 없이 2주간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지냈다. 국내와 일본 여행을 혼자 몇번 가봤음에도 걱정됐다. 거리도 멀고 연고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바로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으로 잘 알려진 김지우 언니다. 그와 함께하며 ‘장애인 간의 연대’를 몸소 체험했다.
언니와 여행 내내 붙어 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 일정을 홀로 보내다 각자 시간이 맞을 때 만났다. 내 숙소는 휠체어 두대가 들어갈 수 있는 장애인 전용 객실이라 밤까지 같이 있을 수 있었다. 단둘이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평소였으면 비장애인에게 부탁했을 일을 서로 도우며 해냈다. ‘도움은 비장애인에게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장애인끼리도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행 초반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합이 잘 맞았다.
우리는 똑같이 휠체어를 타지만, 장애의 양상은 꽤 다르다. 언니는 하체에 비해 상체의 가동범위가 더 좁으며, 나는 그 반대다. 덕분에 서로 필요한 부분을 손쉽게 보완할 수 있었다. 한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일정을 마친 뒤 씻고 나와 거울을 보는데, 언니가 머리를 묶어줄 수 있냐고 물었다. 흔쾌히 수락하고 머리를 묶어줬다. 일상의 사소한 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돌이켜 보니 이전에도 장애인에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가고 싶은 아이돌 콘서트에 휠체어석이 없어 팬카페에 항의 글을 올렸었다. 꽤나 파장이 커 여러 비장애인 팬들이 글을 공유하고 함께 소속사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상황을 본 다른 장애인 팬분이 공연 관람 방법에 관해 물어와 답변을 드렸다. 그러나 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 뒤로 팬분의 소식을 듣지 못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장담할 수 없다. 반면, 물리적인 한계와 언어와 환경이 바뀐 상황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더해진 이역만리 타지에선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소수자의 연대는 ‘협력’이다.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을 넘어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을 함께 해내는 것. 이러한 경험은 장애인의 삶을 확장시킨다. 더 능동적이고, 자립적이고, 나아가 다른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돕는 장애인으로 성장한다. 직접적인 도움이 아니어도 괜찮다. 능동적인 장애인의 존재 자체를 이상향으로 삼아 용기를 얻는 장애인들이 많다. 내가 그랬으니 말이다. 또한 같은 어려움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땐 자연스레 더욱 섬세해진다. 상대가 스스로 해낼 수 있게 기다려주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을 땐 쉬이 경험하기 힘들다.
일상의 대부분을 비장애인과 보내며 그들의 도움을 받을 때 내심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편견 또한 한몫한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장애인의 의사를 옆에 있는 비장애인에게 묻는 경우도 있다. 비장애인과 함께 밖에 나가면 늘 안절부절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을 땐 미안하지 않다. 대신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상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돈독해지는 건 덤이다.
몇년 전, 언니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나중에는 부모님 없이 둘이 만나자.” 이 문장이 쉬이 현실이 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도움받을 비장애인이 없다는 전제를 상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면의 강인함과 용기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는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소중한 추억들을 만들었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뒤 더욱 당차고 밝아졌다. 휠체어 두대가 나란히 거리를 질주하는 모습에 따라붙는 시선이 싫지 않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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