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형의 여담] ‘패스트 라이브즈’와 이주민의 문화적 정체

한겨레 2024. 3. 6. 18: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여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씨제이이엔엠 제공

김민형 | 영국 에든버러 국제수리과학연구소장

한국계 북미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셀린 송이 만들어서 작년에 개봉된 자전적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미국과 유럽에서 주목받으며 상영된 후 3월에 발표될 올해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 (이 글이 나간 뒤 며칠 내로 결과가 알려질 것이다.) 세상에 흔한 주제인 이민과 자아실현으로 출발해서 이 영화는 사랑과 인연에 대한 작가의 심오하고 간결한 명상을 공유하며 끝을 맺는다. 어찌 보면 진부할 수 있을 내용 같지만 실은 한국 출신 이주민의 관점으로 드물게 성숙하고 섬세한 관찰력과 세계관을 표현하다. 송 감독은 유년기 이후로 북미에서 자라고 활동해 왔지만 그의 영화는 한국 사회와 문화가 나날이 발전하며 세계문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줄거리는 상당히 단순하다. 주인공 나영은 열두살 나이에 부모와 함께 캐나다로 이민 가면서 늘 자신을 감정적으로 북돋워 주던 친한 친구 해성과 헤어진다. 12년 후인 24살에 둘은 인터넷을 통해서 서로를 발견하고 나서 원거리 연애에 착수한다. 곧 일에 쫓기는 삶 때문에 다시 헤어진 후 12년이 또 지나고, 해성은 뉴욕에 자리 잡고 이미 결혼한 나영을 방문한다. 두사람은 이틀간 도시를 배회하며 과거와 현재에 대한 다정하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눈다. 재회의 마지막 몇 시간은 나영의 자상한 작가 남편 아서도 합류한다. 동이 틀 때쯤 해성은 다음 생애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남기고 공항으로 떠난다. 이 만남에서 우러나오는 인생과 영겁에 대한 고찰, 그리고 주인공들의 깨우침이 영화의 전부이다.

영화의 강점은 이런 단순한 이야기 속에 무한히 섬세해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진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이 목격하는 부분은 나영과 해성의 삶 약 24년 중 잠시뿐이지만 효율적인 장면 선택과 조용하고 자연스러운 대화가 엮어 가는 화상의 화성과 대위법이 인물들의 생활상과 성장 과정의 핵심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한 예로 이민한 어린이의 경험은 나영이 학교 놀이터에서 다소 쓸쓸하게 서 있는 장면 하나로 요약된다. 흔하고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이방인의 번뇌’를 과감하게 생략하는 결정이 이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감독은 몇개의 장면과 대화의 뉘앙스를 통해서 나영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내용을 전부 담아 전하는 특이한 기법을 과시한다. 이런 결정들은 이야기 전체에 일종의 객관적 관점을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

영화의 여러 요소 중에 나에게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주민을 대하는 관점의 시대적 진화였다. 영화 시작 부분에 나영이 교실 안에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왜 이민 가느냐’를 꽤 집요하게 묻는다. 나와 비슷한 세대 한국인은 그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의 부모 세대는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의 끔찍한 파급 효과를 채 벗어나지 못한 환경에서 자랐고, 내 친구들 가운데도 미국이나 캐나다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로 비교적 편안한 가정이 한국을 떠날 이유가 많지 않았을 현실이 아이들의 순진한 대화에 나타난다. 질문에 대한 나영의 답 ‘한국인은 노벨 문학상을 못 받기 때문’ 역시 20세기 말의 시대상을 잘 묘사한다.

이 영화 관람은 나 자신이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되새길 기회였다. 유학을 목적으로 서울에서 미국으로 떠난 것이 약 40년 전이지만 항상 학업의 연속이라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인지 스스로 이민했다는 사실을 인식 못할 때가 많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직업을 쫓아서 미국의 여러 지역, 그리고 영국에서도 네 대학을 옮겨 다니면서, 단기적 목표와 동기를 항상 학자의 네트워크 속에서 찾았다. 그러던 중 나 역시 영화 속 나영처럼 일상의 은혜를 받아들이면서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 나가고 있고, 그 자체가 지금 나의 정체성을 이룬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면서 들었다.

‘패스트 라이브즈’를 관람하며 무엇보다 젊은 이주민 작가의 창조적 지혜가 인상적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잇대 사람들은 회고하는 마음을 자기중심적 낭만과 구별하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다. 젊은 한국계 예술가가 만들어낸 감성과 객관성의 완벽한 조화를 감상하며 우리나라의 시대적 발전을 새롭게 목격할 수 있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