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 농부의 철학을 담아 … 멋 내지 않아도 우아한 피노누아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의 와인 이야기]

김기정 전문기자(kim.kijung@mk.co.kr) 2024. 3. 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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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 허쉬 와인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에 위치한 허쉬 빈야드의 모습.

서울 강남구 청담스퀘어 뒤쪽으로 '파스토'라는 파스타 음식점이 있었습니다. 다소 덜 익힌 듯한 '알 덴테'(al dente)를 잘하는 맛집이었는데 코로나19 시국을 거치면서 지금은 와인 바로 바뀌었습니다. 와인 바 이름은 레 꼬빵(Les Copains)으로, '친구들'이란 뜻입니다.

레 꼬빵은 신동혁 오너 소믈리에가 운영합니다. 신 소믈리에는 이력이 화려합니다.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이자 국내 최고 소믈리에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정식당'의 소믈리에로 2014년 한국 소믈리에 대회, 2016년 코리아 소믈리에 오브 더 이어에서 우승을 차지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인 베누(Benu)의 소믈리에로 활동하다 귀국해 직접 와인 바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레 꼬빵에선 1400종류의 와인을 취급한다고 합니다. 와인 리스트가 55쪽에 달합니다. 이 와인 리스트에서 당당히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와인이 미국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 '허쉬 빈야드(Hirsch Vineyard)'입니다. 최근 허쉬 빈야드의 2세 소유주인 자스민 허쉬가 한국을 방문해 레 꼬빵에서 만났습니다.

허쉬 빈야드 창업자인 데이비드 허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의류 사업을 하던 와인 애호가였습니다. 특히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는 1978년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에 땅을 매입합니다. 태평양 해안에서 불과 4㎞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땅입니다.

'캘리포니아' 하면 강렬한 태양과 반소매·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신은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만 해도 한여름에 겨울 코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제법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소노마 해안가는 서늘한 기후로 유명합니다. 서늘한 기후에서 좋은 맛을 내는 피노 누아의 천국인 셈이죠.

하지만 데이비드 허쉬가 처음 이 땅에 양조용 포도를 심는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미쳤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해발고도가 높아 주위에는 포도밭 하나 없었기 때문입니다.

2013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한 허쉬 빈야드 소개가 인상적입니다. '시원한 소노마 해안의 피노 천국, 이 지역 첫 와이너리를 세운 데이비드 허쉬를 만나러 가다'라는 제목의 기사인데요. 첫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이미 한 시간 전에 휴대폰이 작동을 멈췄다. GPS도 작동을 안 하고 구글 맵도 소용없다. 비포장도로에 서 있는 전봇대만이 이 지역에도 '문명이 있구나'를 알려준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잘 관리된 포도밭이 언덕 위로 나타났다."

데이비드 허쉬가 처음부터 와인을 생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키슬러, 윌리엄 셀럼, 리토라이 등 유명 와인 회사들이 허쉬의 포도를 사 가서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포도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허쉬 빈야드는 그랑 크뤼급 포도밭으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데이비드 허쉬는 2002년부터 자신의 와인을 만들었습니다.

자스민 허쉬는 "아버지는 와인 메이커라기보다는 농부였다. 지금도 우리가 하는 일은 상대적으로 와인 생산보다 농사에 가깝다. 테루아가 와인에 가장 잘 묻어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허쉬 와인은 화장기 없는 맨얼굴의 와인입니다. 와인 메이커가 아닌 농부의 와인입니다. 가능한 한 심플한 양조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섬세한 피노 누아를 생산합니다. 캘리포니아 와인 하면 떠오르는 강렬한 풀바디 와인을 기대했다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바닐라 맛이나 버터 향이 강한 와인을 예상했다면 또 한 번 실망할 수 있습니다.

허쉬 와이너리는 60개 블록(구역)으로 나눠 관리하는데 라쉔 릿지(Rashen Ridge) 피노 누아 2021년 빈티지가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에게서 100점 만점을 받았습니다. 허쉬 와이너리의 생산 철학이 제임스 서클링과 맞았기 때문에 높은 점수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제임스 서클링은 매일경제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매입한 뉴질랜드 와이너리에서 화장을 지운 맨얼굴의 피노 누아를 생산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시음에는 2020년 빈티지 레드와인도 나왔습니다. 캘리포니아 내파, 소노마 지역의 2020년 빈티지는 논란의 빈티지입니다. 대형 화재로 발생한 연기가 포도 껍질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오퍼스 원 등 유명 브랜드 생산자들이 생산을 포기한 빈티지입니다. 허쉬는 호주 연구소에 포도 샘플을 보내 일일이 검사했고, 연기에 영향을 받지 않은 포도만 2020년 빈티지를 만들었습니다. 평년의 약 50%만 생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 데이비드 허쉬가 가장 아낀 블록에서 생산한 포도로만 만든 블록8 피노 누아, 리저브 피노 누아, 허쉬의 주력 와인 샌 앤드리아스 폴트(San Andreas Fault) 피노 누아 등은 2020년 빈티지가 생산됐습니다. 라쉔 릿지와 이스트 릿지, 마리타임, 더 올드 빈야드 등은 2020년 빈티지가 없습니다.

허쉬 빈야드 와인은 싸지 않습니다. 리저브 피노 누아는 프랑스 프리미어 크뤼 정도에 가격대가 형성돼 있습니다. 생산량이 많지 않은 것이 가격에 반영돼 있습니다. 한국 소비자들이 허쉬 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캘리포니아 소노마 코스트에 위치한 허쉬 빈야드의 2세 소유주인 자스민 허쉬(왼쪽)가 한국을 방문해 청담동 와인 바 레 꼬빵의 신동혁 오너 소믈리에와 허쉬 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CSR와인

보통 피노 누아를 사랑하는 한국 와인 소비자는 프랑스 피노 누아를 즐깁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미국 소비자는 오리건 피노 누아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강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시장에선 오리건 피노 누아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레 꼬빵에서 소노마 코스트의 피노 누아인 허쉬를 판매하는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신 소믈리에는 "소믈리에의 역할이 필요한 와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전형적인 캘리포니아 와인 스타일이 아니라 섬세하고 우아함을 지녔으며, 숨겨진 보석 같은 와인이기에 소비자에게 허쉬의 정체성과 철학 등을 소믈리에가 소개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섬세하고 테루아를 잘 표현하는 와인을 선호하는 애호가에게 소개하기 좋은 와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경기 침체로 레스토랑과 와인 바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와인 셀렉션과 그 와인을 잘 소개할 수 있는 소믈리에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시기입니다.

신 소믈리에는 "가격 경쟁력이 와인 바 운영의 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격만 생각하는 소비자는 더 싸게 파는 곳을 찾아 움직이게 된다. 오히려 와인 바의 와인 리스트가 와인 바의 정체성이며 경쟁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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