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률식 발라드와 비슷”…젊은 작곡가들이 말하는 요즘 가곡이란.
듣기 쉽게…대중음악과 혼합 형태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리운 그대를/ 못 참고 보러왔소/ 웃음 띈 얼굴을 만나니 참 기쁘오/이 웃음소리 듣고파 왔소” (가곡 ‘낮달’ 중)
조심스레 뱉어낸 말 뒤로 그리움이 묻어난다. 소박한 우리말에 숨어든 수줍은 외사랑이 유려한 피아노 선율을 입고 벅찬 감정을 쌓는다. 창작 가곡 ‘낮달’은 지난 100년 간 불려온 한국 가곡과 닮은 듯하지만 또 다르다.
‘낮달’을 쓴 이진욱 작곡가는 “1차원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닌 이뤄지지 않아 씁쓸하지만 아름다운 감정과 기억이 정제돼 나올 수 있는 가곡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한국 최초의 가곡으로 꼽히는 홍난파의 ‘봉선화’(1920)가 태어난 지 10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 가곡은 무수한 진화를 거듭 중이다. 클래식을 전공하고 발라드와 K-팝의 홍수 속에서 살아온 젊은 작곡가들이 만든 가곡은 또 다른 변주를 만든다. 가곡의 정서를 품고 있으면서도 ‘요즘 요소’들이 묘하게 스민다.
가스라이팅과 스토킹이 난무하는 시대, 가곡의 언어는 언제나 무해한 청정 지역이다. 아름다운 시어(詩語)는 차마 전하지 못한 마음을 품고 있고, 닿지 못한 애틋함을 오롯이 간직한다.
한국 가곡을 관통하는 정서는 단연 ‘그리움’이다. 멀어진 고향을 향한 애틋함을 담은 최영섭의 ‘그리운 금강산’, 신홍철의 ‘산아’, 2019년 나온 윤학준의 ‘마중’에 이르기까지, 가곡엔 언제나 그리움이 담겼다. 2020년대에 태어난 창작 가곡 ‘낮달’(2023), ‘소망’(2023)도 이 정서를 고스란히 품었다.
‘낮달’이 태어난 과정은 독특하다. 보통의 가곡은 시(詩)에 곡을 붙여 태어나지만, ‘낮달’은 노랫말이 지어지기도 전에 곡이 먼저 나왔다. 이진욱 작곡가는 “대부분의 가곡 작곡은 시가 주어지면 그것을 망가뜨리지 않는 선에서 작업을 하게 되는데, 이번엔 반대의 과정이었다”며 “가곡이 가진 특성을 고려해 ‘추억의 빛깔’을 떠올릴 수 있는 곡을 썼다”고 말했다.
이 작곡가의 곡에 붙일 시는 ‘백일장’에서 찾았다. 지난해 한글날을 맞아 마포문화재단이 진행한 ‘2023 훈민정음 망월장’엔 무려 300여 편이 응모했다. 저마다의 정서를 품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시엔 ‘공통의 정서’가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던 이진욱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과거를 떠올리며 전하지 못한 마음을 혼자 꺼내보는 시들이 무척 많았다”고 말했다. 2020년대의 가곡에서도 ‘그리움’의 정서는 통한 것이다.
그리움의 대상은 다양하다. 어느 시절 멀리 떠나온 고향이었고, 어느 날 이루지 못한 사랑도 있었다. 아무리 닿으려 해도 닿지 않는 대상을 향한 애틋함을 ‘가곡’이라는 장르를 빌려 꺼내왔다.
‘요즘 가곡’을 쓴 두 작곡가가 가곡 창작에서 중요하게 염두한 것도 ‘정서’다. 이 작곡가는 “50대 이상에겐 지나온 시절을 돌아본 쓸쓸함의 감정이겠지만, 그 정서가 비단 지금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며 “요즘 세대에서 유행하는, 굳이 고백하지 않는 짝사랑의 정서와 닮았다”고 했다.
손일훈 작곡가는 ‘2023 훈민정음 망월장’의 심사위원장인 나태주 시인의 ‘소망’에 곡을 붙였다. 그는 “‘소망’이라는 시는 짧지만 읽을수록 깊이 생각하게 되고 마음에 와닿았다”며 “사랑하는 존재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이 시의 제목인 ‘소망’으로 지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고 했다.
가곡에 있어 가사와 멜로디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무엇보다 노랫말이 되는 시의 내용을 파악하고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젊은 작곡가들은 강조한다. 역순으로 작업한 이진욱 작곡가는 이런 이유로 ‘낮달’의 노랫말을 만난 이후 곡을 수없이 다듬었다. 그는 “음악이 드러나는 것보다 가사가 잘 전달돼야 한다는 생각이 컸고, 가사의 기승전결을 정확하게 전달해줄 수 있는 곡으로 다듬어갔다”고 말했다.
손 작곡가 역시 “시의 메시지와 결이 다른 음악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며 “시의 메시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나의 관점으로 표현하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왜곡하지 않는 것을 주의했다. 나를 드러내거나 실험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고, 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다”고 강조했다.
가곡은 한 때 꽤나 찬란한 시절을 보냈다. 100년의 긴 시간만큼이나 가곡의 생도 고단했다. 1920년대 초반 태어난 이후, 작곡가들의 친일·월북·독재정권 부역 논란으로 가곡의 역사를 정리하는 과정엔 여전히 풀지 못한 문제가 산재해 있다. 파란만장한 일대기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1970~80년대는 소위 말하는 한국 가곡 전성시대였다. 당시 지상파 프라임 시간대인 ‘9시 뉴스’ 전후로 희귀작에 가까운 ‘가곡 뮤직비디오’가 방영됐고, MBC대학가요제에선 현재 가곡계를 이끄는 히트 작곡가인 김효근 이화여대 교수를 배출했다. 하지만 1990년대 대중음악 전성기와 맞물리며 자취를 감추다, 2010년대 이후 예술가곡(김효근 중심)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성을 입으며 다시 불렸다.
손 작곡가는 “옛 우리 가곡은 밝은 가사와 힘찬 노랫소리로 어떤 사물이나 감정을 웅장하고 흥겹게 승화하기도 했고, 멜로 드라마 같은 가곡이나 전통 음악, 실험 가곡으로 나아가기도 했다”며 “시대가 변하며 가곡도 매번 다른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가곡은 이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지난한 역사 안에서의 논쟁을 뛰어넘어 ‘요즘 가곡’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진취적 발상도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 자리한다. 이들은 가곡에는 무엇보다 ‘대중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두 작곡가의 창작 가곡 역시 ‘가곡의 정체성’과도 같은 한국적 정서는 품었지만, 곡의 흐름은 익히 들어온 기존 가곡과 닮은 듯 다르다. 서양 클래식을 전공한 두 작곡가는 학창시절 슈베르트와 슈만의 가곡을 공부했고, 한국 대중음악 전성기 시절을 함께 살아가며 알게 모르게 대중음악이 귀에 익었다. 덕분의 이들의 곡은 조금 더 세련된 ‘요즘 음악’이 됐다.
손 작곡가는 “가곡은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대중이 따라부를 수 있는 음악이어야 한다”며 “전문적인 가수만 부르는 어려운 아리아가 아니라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불러보고 싶은 노래여야 한다”고 했다. 이 작곡가는 “숨김의 미학을 살려 누군가에게 은유적으로 재생산되는 곡이 요즘 가곡으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낮달’은 절제된 감정으로 가사의 의미를 전달하면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멜로디를 더했고, ‘소망’은 발라드와 같은 잔잔한 멜로디에 고전적인 피아노 반주를 입혀 노랫말의 감정이 쉽게 전달되도록 했다.
이 작곡가는 “한국은 물론 전 세계의 가곡 부흥기를 보면 민족 고유의 것을 찾으려 했고, ‘가곡은 이러해야 한다’는 방식에 경도된 때도 있었다”며 “지금의 가곡은 오히려 대중음악과 믹스된 형태라고 본다”고 말했다. 손 작곡가 역시 “고전 가곡이 그 당시의 가요였듯이 요즘 가곡들은 가요의 발라드처럼 대중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며 “요즘 가곡은 발라드, 뮤지컬, 낭독 등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경계의 구분이 모호하다. 요즘 가곡은 한 마디로 정의하면 스며드는 장르”라고 했다.
가곡은 더 이상 지루하고 고루한 ‘옛날 노래’만은 아니게 됐다. 최근 몇 년 동안 남성 사중창단을 뽑는 경연 프로그램 ‘팬텀싱어’(JTBC) 시리즈 이후 한국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들이 늘며 가곡의 진입장벽도 낮아졌다. 한국 가곡 부흥을 위한 노력도 많다. 마포문화재단은 가곡 뮤지컬 ‘첫사랑’을 제작하는가 하면, 인디밴드를 통해 ‘모던가곡’ 시리즈 프로젝트를 진행해 음원을 내기도 했다.
이 작곡가는 “요즘 시대의 가곡은 음악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여러 감정적인 생각들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곡이지 않을까 싶다”며 “가수 김동률의 잔향과 같은 곡이 어쩌면 요즘 시대에 딱 맞는 ‘가곡’이다. 가곡의 정체성을 담되 지금의 이미지로 다양한 세대가 찾을 수 있는 장르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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