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설빈’의 화음에선 제주 밤하늘 별들이 쏟아진다
“넌 느리고 게으르니 ‘여유’가 어때?” 고등학교 밴드부 시절 음악 강사로 알게 된 선생님이 말했다. 201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을 해보겠다고 그 선생님을 따라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스무살 청년 황동규는 음악가 여유가 됐다. “돌이켜보면 음악을 배웠다기보다는 같이 술 마시고 얘기한 기억밖에 없어요. ‘좋은 음악을 하려면 테크닉보다 먼저 좋은 사람이 돼라’ 같은 얘기요.” 지난달 17일 서울 마포구 공연장 언플러그드 홍대에서 만난 여유가 말했다. 그는 이날 공연을 위해 제주 집에서 올라왔다.
2015년 설빈(박설빈)은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서 교사 임용시험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 홍대에서 공연하는데 놀러 올래?” 에스엔에스(SNS)로 친해진 여유가 연락해왔다. 공연에 몇번 갔더니 코러스를 해달라고 했다. 급기야 여유의 발표곡 ‘상자’(2016)에 피처링으로 참여하게 됐다. 여유 1집 녹음에도 목소리를 꽤 많이 보탰다. “이 정도면 ‘여유와 설빈’으로 하는 게 어때?” 음반 프로듀서가 제안했다. 설빈은 고민했다. ‘인연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결국 수락했다. “해보니 음악가로 사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후회도 했죠.” 역시 제주에서 올라온 설빈이 말했다.
2017년 포크 듀오 여유와 설빈 이름으로 1집 ‘모든, 어울린 삶에 대하여’를 내놓았다. 앨범 발표 직전 설빈은 임용시험에 합격해 중학교 상담교사가 됐다. 근무지는 제주도. 연고는 없지만 제주의 삶을 꿈꿔 지원했다. 여유도 1집 작업을 마치고 제주로 내려왔다. 둘은 2020년 결혼식을 올렸다. 그 전해에 발표한 2집 ‘노래는 저 멀리’는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음반 후보에 올랐다.
지난해 11월 발표한 3집 ‘희극’은 오롯이 제주에서 빚어낸 음반이다. 이전과 달리 녹음 작업까지 제주의 녹음실과 집에서 했다. 설빈은 “여유가 만든 곡들을 들었을 때 ‘이런 정서의 노래라면 서울이 아니라 제주에서 녹음해야 한다’고 강하게 얘기했다”고 말했다. 여유는 “서울 스튜디오처럼 깔끔한 녹음은 아니지만 잡음과 생활 소음이 들어가 오히려 따뜻한 느낌”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소박한 연주와 담백한 선율에 오랜 사유로 숙성된 노랫말을 꾹꾹 눌러 담았다. 여유가 노래의 뼈대를 세우면, 설빈이 화음으로 입체감을 살린다. 낮은 옥타브의 여유와 높은 옥타브의 설빈이 하나의 음(유니즌)으로 부르다 어느 순간 두 갈래로 화음을 확 펼쳐내면, 노래는 투디(2D)에서 스리디(3D)로 바뀌어버린다. 이는 공동 타이틀곡 중 하나인 ‘밤하늘의 별들처럼’에서 두드러진다. 후반부에선 제주 밤하늘의 별들이 나에게 쏟아져 내리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갑자기 다른 노래를 부르는 여유의 목소리가 슬쩍 들리는데, 이는 2집 수록곡 ‘길고 긴 밤’의 몇 소절이다. 여유는 “영화 속 이스터에그처럼 숨겨놓은 것”이라며 “앨범을 영화나 연극처럼 만들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3집 발표 뒤 “앨범 정말 좋다”는 연락을 낯설 만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여유는 “1집·2집 때는 인정도 받고 상도 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상 안 받아도 떳떳한 결과물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열린 제21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여유와 설빈은 최우수 포크 음반(‘희극’)과 노래(‘밤하늘의 별들처럼’) 트로피를 안았다. 여유는 5일 전화 통화에서 “시상식장에선 실감이 안 났는데, 어제 제주도에서 같이 앨범 작업한 사람들과 잔치를 하면서 그제야 실감했다. 음악가 여유로 산 지난 10년에 대한 보상 같기도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얻었다. 이 앨범이 최고작으로 남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인터뷰 막바지에 여유는 문득 김민기 얘기를 꺼냈다.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가 김민기 선생님이에요. 힘들 때 그분 노래를 들으며 살아냈죠. 학전이 사라진다는 기사 읽고 마음 아팠어요.” 그는 1집 수록곡 ‘생각은 자유’에서 존 레넌·밥 딜런·한대수·김민기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대표곡 가사를 차용한 바 있다. “‘아침 이슬’ 인용 허락을 받고자 김민기 선생님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냈더니 아무 말 없이 도장이 찍힌 개작동의서 파일만 날아왔어요. 그게 한동안 제 컴퓨터 바탕화면이었죠.”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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