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의사가 죽어 환자와 국민이 살 수 있다면야

이형기 서울대병원 교수 2024. 3. 6.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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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서울대병원 교수

병원을 나간 전공의가 돌아 오지 않자 대표적인 수련 병원의 원장들이 잇달아 호소문을 발표했다. 모 의대 학장도 의사의 사회적 책무를 언급하며 희생을 강조하는 졸업식 축사를 했다. 언론은 이들의 호소문과 축사를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시한에 맞춰 돌아 온 전공의는 고작 5%에 불과했다. 며칠이 더 지나도 복귀 숫자가 늘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수련병원 원장들의 호소나 의사의 책무를 강조한 학장의 축사가 젊은 MZ,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Z세대 전공의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잘 알려진 대로 MZ세대의 특징은 개인주의다. 자기주도적 결정의 주체인 개인으로 자신과 남을 대하는 특성이 MZ세대에 도드라진다는 뜻이다.

내가 병원과 학교에서 경험했던 MZ세대는 자신의 일이 가치가 있고 사회에 기여하기를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강하게 바란다. 동시에 MZ 젊은이는 공정의 가치를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따라서 자신이 기여한 일에 공정한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하든 언제든지 그 일을 그만 둘 준비가 돼 있다. 더 이상 성장할 전망이 없다면 다른 일을 찾는 것도 MZ 세대의 특징이다. MZ 젊은이는 돈을 버는 수단으로만 일을 바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의대 입학 정원 2000명의 증원 계획이 담긴 필수의료 패키지와 이후 정부의 대처가 어떻게 전공의 대거 사직 및 미 복귀를 초래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를 ‘환자를 볼모로 자신의 이익만을 좇는’ 악당이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데 열중했다. 이 전략은 의사와 비의사 사이의 대립 구도를 심화해 의사 집단을 압박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와 사회 기여를 중요하게 여기는 MZ 전공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동안 수 많은 날 밤잠을 설쳐 가면서도 환자의 생명을 구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텨 왔던 전공의들은 ‘이런 비난과 욕을 먹어 가며 왜 굳이?’라는 자괴감에서 빠져 나오기 힘들었다. 정부의 연이은 압박이 이 상황을 되돌리기 어렵게 만든 것은 두 말 하면 잔소리다.

근무 시간과 업무 강도에 비해 너무 적은 박봉에도 수 년을 전공의로 수련 과정을 견뎌냈던 이유 중 하나는 전문의 취득 이후에 받을 공정한 보상이었다. 물론 ‘35세 전문의 연봉 4억원’에는 턱도 없이 못 미치는 금액일 뿐이다.

전공의의 병원 복귀를 가로막은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는 필수의료를 하면 더 이상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는 냉혹한 깨달음이었다. 정부는 필수의료를 살린다며 5년 동안 1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균등하게 매년 2조원을 쓴다고 가정하면 2022년 한국의 경상의료비 총액 209조원 대비 1%도 안되는 돈이다. 한 마디로 ‘언 발에 오줌 누기’인 셈이다.

그러나 돈 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부가 내놓은 안에 따르면 의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의사의 과실이 아니어도 면책이 보장되지 않는다. 의사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상황에서 어떤 전공의가 필수의료를 하겠다고 병원에 돌아올까. 대법원이 무죄로 선고한 신생아 사망 사고에서 의사들을 구속하고 포토라인에 세웠던 장면을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 목도했던 게 MZ 전공의들이다.

사실 병원장들이 급하게 호소문을 낸 이면에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전공의 사직으로 수련병원에 환자가 오지 않으니 병원 수입이 급감해 당장 인건비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따라서 이런 속내를 감춘 채, 이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전공의들에게 아무리 미사여구로 감동적인 복귀를 호소한다고 한들 말을 들을 리 만무하다.

결국 복귀율이 기대에 못 미치자 정부는 전공의 사직의 주모자를 색출해 엄벌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시킨다고 어떤 일을 하지 않는 MZ 세대의 ‘개인주의’를 이해하지 못 하니 이런 말을 쉽게 입에 담는다. 급기야 세계의사회가 한국 정부에 “의료계를 향한 강압 조치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게다가 유수의 영국의학저널(BMJ)은 사설에서 한국 정부의 조치를 ‘협박(threat)’이라고 표현했다.

현 사태를 타개할 유일한 방법은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논의를 시작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전혀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며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답만 하면 돼)’ 엄포만을 늘어 놓았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면 상대를 대화의 테이블로 끌어 들이기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정부가 제안한 비밀 모임에 참석한 전공의 숫자는 서너 명에 불과했다.

정부가 2000명 증원의 근거로 제시한 세 편의 보고서 어디에도 이 숫자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심지어 어떤 보고서는 정부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가져다 썼다. 어디 그 뿐인가. 학생 2000명이 늘어나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의대 학장들의 확인을 받았다고 정부는 강변하지만 그것은 삭감을 상정해 대학 본부가 부풀렸던 희망 숫자였음이 드러났다. 더군다나 국공립과 사립을 막론하고 대학 운영에 필요한 재정의 상당 부분을 정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이 나라에서 학생 숫자는 곧 지원금인데 이를 마다할 보직자가 과연 있을까.

의사가 죽어 환자와 국민이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부가 의사를 죽여 의료 시스템을 무너뜨리면 어느 누구도 살기 어렵다. 그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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