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개정 느리다'…기업 정관 바꿔 주주권익 강화해야

김보라 2024. 3. 6.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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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거버넌스포럼, 5일 '모범 연성규범' 발표
주총소집공고 앞당기고 자사주소각 의무화
거래소 상장규정‧지배구조보고서도 개정해야
"신규상장사 모범정관 채택가능성 높을 것"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기업가치 높이기)을 발표한 지 2주가 지났지만 소액주주들의 반응은 영 달갑지 않다. 밸류업 프로그램을 기업 자율에 맡기면서 상장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밸류업 프로그램뿐만이 아니다. 현재 정부가 내놓은 공매도‧전환사채‧자기주식 등 코리아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를 위한 수많은 제도개선 내용들은 상법이나 자본시장법을 고쳐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다.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개정 법안들도 21대 국회에 올라와 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일반주주들이 정부의 제도개선안을 두고 공염불만 외치고 있다며 신뢰하지 않는 이유다.    

이런 가운데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이하 거버넌스포럼)이 상법‧자본시장법 개정 없이도 주주권익을 한층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상장사 정관과 거래소 상장규정, 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 및 ESG모범규준에 주주권익을 강화할 수 있는 내용을 담아 코리아디스카운트를 해소하자는 것이다. 

거버넌스포럼은 지난 5일 서울 여의도에서 '모범 연성규범' 관련 기자간담회를 열고, 법 개정에 앞서 강제력이 없는 연성규범(정관‧상장규정‧모범규준‧기업지배구조보고서 가이드라인)을 통해 주주권익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공개했다. 

4주전 주총소집공고, 자사주 의무소각

이날 상장회사 모범정관을 주제로 발표한 김주영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모범정관을 잘 만들면 굳이 상법‧자본시장법 개정은 안 해도 된다"며 "기업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니라 원칙과 상식에 부합하는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거버넌스포럼이 제시한 모범정관은 기존 한국상장사협의회(이하 상장협)의 표준정관을 토대로 상법 등 법령에 부합하는 선에서 일반주주의 이익을 공정하게 보장할 수 있는 내용을 덧붙인 것이 핵심이다. 현재 대부분의 상장사들은 상장협이 만든 표준정관을 기초로 자사의 정관을 만들고 있다.  

모범정관은 기존 표준정관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세부적으로 △주주총회 및 주주의 권리 △이사, 이사회 △감사, 감사위원회 △계산 △조직변경 등 표준정관의 세부내용에 주주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내용을 추가했다. 

특히 현재 사용중인 표준정관은 2주전에 주총소집을 통지하면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거버넌스포럼이 제시한 모범정관은 이를 4주 전으로 늘렸다. 임시주총의 소집통지를 위한 이사회 결의도 표준정관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모범정관은 8주전으로 명확히 규정했다. 

김주영 변호사는 "주총소집통지를 4주전에 하도록 해 기관투자자들에게 의결권 행사에 필요한 의사결정 시간을 충분히 줘야한다"며 "임시주총에서도 주주들이 8주 전에 주총소집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해서 6주전까지 해야 하는 주주제안을 현실적으로 가능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또 상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주주제안조항을 모범정관에 넣고 환경‧사회‧지배구조‧자본배치‧주주환원 등에 대한 내용을 구속력이 없는 권고적 결의형태로 주주제안할 수 있도록 했다.

소수주주의 권리행사를 위한 증명절차 간소화 및 주주의 발언‧질문권 명문화, 의결권 대리행사 시 서면위임장뿐만 아니라 전자위임장도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도 넣었다. 

배당과 관련해서도 배당원칙과 기준, 절차 등을 담은 배당정책을 회사 홈페이지에 공시하도록 하고 매년 정기주총에 자본비용과 수익성 평가‧개선에 대한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아울러 자사주 취득 시 3개월 내 소각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넣었다. 또 인적분할 등을 하더라도 자사주에는 신주를 배정하지 않는다는 내용도 담았다. 합병‧분할‧영업양수도 등 중대한 조직변경이 있을 때는 전체 주주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함을 명문화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주재로 5일 서울 여의도 IFC에서 열린 '모범 연성규범' 기자간담회에서 토론자들이 발언하고 있다./사진=김보라 기자

정관에 이사의 충실의무 넣자 

이사회 규정에서 현행 표준정관은 이사 수를 몇 명 이내로 제한하고 있지만, 거버넌스포럼이 제시한 모범정관은 이사의 수 상한선을 삭제했다. 또 이사선임 시 선임할 이사 수보다 후보자 수가 많으면 전원을 일괄 상정해 다수의 찬성표를 얻은 후보자를 선임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는 소수주주가 제안한 이사후보자에 대한 표결기회가 원천 봉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다.

뿐만 아니라 이사의 충실의무를 넣어 회사를 포함 전체 주주를 위해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조항도 신설했다. 아울러 이사는 모든 주주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내용도 명문화했다. 

김주영 변호사는 "이사의 충실의무는 OECD가이드라인에도 명시되어 있는 부분이며, 이사회를 경영진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 중에서 선임하는 내용도 추가했다"고 설명했다. 

경영감시 기능을 하는 감사위원회와 보수위원회를 사외이사로만 구성한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또 감사위원회 위원 중 2명은 사외이사로만 구성하도록 하고 그 중 2명은 분리선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현재는 감사위원 1명만 분리선출 하도록 표준정관에서 규정하고 있다.

아울러 회사가 자기자본의 5%이상 외국법인 또는 단체의 주식 취득 등을 하는 경우 감사위원회의 사전승인을 얻도록 했다. 이는 지난 1998년 SK텔레콤에 대한 소액주주연대 운동이 일어난 후 당시 SK텔레콤이 정관규정을 바꾼 내용을 참고했다.

거래소‧ESG기준원 규정도 바꾸자 

거버넌스포럼은 한국거래소의 상장규정과 기업지배구조 가이드라인, ESG기준원의 모범규준도 고쳐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거래소의 상장규정은 법률의 위임을 받아 만든 것이기 때문에 구속력이 있어 더욱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거래소 규정과 ESG기준원 모범규준 개정에 대해 설명한 김규식 변호사는 "선진국은 법에 있거나 판례를 따르고 자본시장에 확립된 관행이 있어 회사 정관에 주주권익을 보호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며 "우리나라는 이런 법과 판례, 관행이 없기 때문에 이사회가 무력화하고 주주권익이 침해되는 등 코리아디스카운트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거래소 규정은 유가증권시장‧코스닥시장을 각각 관할하는 상장규정과 공시규정 2가지가 있다. 상장규정은 신규상장과 상장폐지 등을 담고 있으며, 공시규정은 회사의 주요 경영사항에 대한 공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거버넌스포럼이 제시한 거래소 규정 개정안은 △주총소집 통지기한 확대 △임시주총 안건 기재 구체화 △상장회사 이사의 결격사유 확대 △감사의 독립성 강화 △주총 찬반결과 비율 공시 등이다. 

이중 임시주총 안건기재 구체화는 지난해 있었던 현대엘리베이터의 임시주총 문제에서 착안한 내용이다. 

지난해 12월 현대엘리베이터는 임시주총을 열면서 '이사 선임의 건'이라고 포괄적으로 밝히고 세부의안은 추후 확정한다고 공지했다. 이후 임시주총 2주전 회사가 밝힌 세부의안은 회사측이 제안한 감사위원을 새로 선임하는 내용이었다. 그 사이 KCGI자산운용 등 현대엘리베이터 주주들은 주주제안권을 사용조차 하지 못하고 회사의 임시주총 선임과정을 지켜만 봐야 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거버넌스포럼은 ESG기준원이 만든 모범규준과 거래소의 기업지배구조 가이드라인에도 이사의 책임기준, 주주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기업의 적절한 조치, 지배주주와 소수주주간의 이해관계 충돌 등에 대한 문제를 다뤄 주주권익 보호를 강화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모범정관도 결국 기업의지에 달려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김명규 트러스톤자산운용 변호사는 "자산운용사도 의결권행사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연성규범이긴 하지만 운용사에겐 매우 강력한 권고로 작용한다"며 "오늘 발표한 연성규범에서 좋은 거버넌스가 무엇인가에 대한 방향성이나 해석을 제시해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에 상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평가했다. 

이창환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 대표는 "오늘 발표를 통해 법을 바꾸지 않아도 좋아질 수 있는게 많다"며 "모범정관을 채택한 상장회사 리스트를 만들면 분명히 모범정관을 채택한 기업 밸류에이션이 높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모범정관은 어디까지나 연성규범이고 상장사들의 의지를 갖고 도입해야 한다는 변수가 있다. 특히 대부분의 상장사들이 상장협의 표준정관을 채택하고 있지만 상장협은 상장회사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에 표준정관을 고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김주영 변호사는 "기존 상장사는 어렵더라도 신규로 상장하는 기업들은 모범정관을 많이 반영할 수 있을 거라 본다"고 설명했다. 

이창환 대표는 "최근 상장한 회사들은 벤처캐피탈(VC) 투자를 많이 받은 만큼 주주를 상대하는 기업들이 많고 IPO때 밸류에이션을 잘 받기 위해서라도 투자자들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에 모범정관을 채택할 기업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내다봤다.  

김보라 (bora5775@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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