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honey] 생명을 담다·시간을 담다…주남과 우포
(창원·창녕=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고단한 날갯짓으로 수천 ㎞를 여행하는 철새들에게 창원 주남저수지와 창녕 우포늪은 낙원이었다.
새들의 합창이 호수 가득 울려 퍼지는 주남은 생명력으로 충만했다. 1억4천만 년의 시간을 담은 우포는 새들의 행복한 삶터, 쉼터였다.
철새와 함께 춤을
경상남도 창원시 주남저수지와 창녕군 우포늪은 영남의 대표 철새 도래지이다.
재두루미, 큰고니, 기러기, 가창오리, 청둥오리 등 겨울 진객들은 대개 시베리아와 북만주에서 번식한 뒤 한반도에는 11월 초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찾아와 월동하고, 2월 말부터 3월 중순에 번식지로 되돌아간다.
겨울 철새들은 약 40㎞ 떨어져 있는 주남과 우포를 오가거나, 멀리는 부산 다대포 옆 을숙도까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날아다니기도 한다.
늪과 호수의 물은 삵, 고양이 등 뭍의 포식자들을 새들로부터 격리해주고, 습지 주변 농경지는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한다.
철새의 이동 경로는 전 지구적으로 크게 8개로 구분된다. 동아시아-호주 경로에 속한 한반도를 방문하는 철새는 겨울 새 110여 종, 여름 새 60여 종, 나그네새 90여 종 등 모두 260여 종, 수백만 마리로 알려져 있다.
나그네새란 한반도에서 겨울이나 여름을 나지 않고 이동 중에 한반도를 통과하는 새를 말한다. 이동하는 새 중에는 그 지역에서 번식지와 월동지를 달리해 떠도는 떠돌이 새, 폭풍우 등으로 인해 우연히 나타난 길잃은 새(미조)도 있다.
동남아시아에서 시베리아까지 수천 ㎞를 날아가는 새들의 이동 경로에서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는 새들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다. 덕분에 한반도는 면적에 비해 다양하고 많은 철새를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되고 있다.
남한의 주요 철새 도래지는 낙동강 하구 외에도 강원도 철원, 서해안 천수만, 금강 하구, 전남 순천만, 울릉도와 독도 등을 꼽을 수 있다.
조류 전문가가 아닌 일반 대중도 다양한 철새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주남저수지에는 전 세계에 6천여 마리밖에 남지 않아 멸종위기 종으로 분류된 재두루미 1천여 마리가 찾아와 있었다.
해 질 녘이면 수십만 마리가 회오리바람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종횡무진 군무를 펼치는 것으로 유명한 가창오리들은 지난해 말에 주남에 왔다가 올해 1월 초 천수만, 금강 하구 쪽으로 이동했다.
멸종 위기종인 가창오리의 90% 이상이 한반도에서 월동한다. 우포에서는 고요한 새벽,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큰고니들 사이에서 수십 마리 기러기들이 힘찬 날갯짓으로 비상하며 숲을 깨웠다.
주남과 우포는 새와 사람이 어우러지고, 함께 춤출 수 있는 공존의 터였다.
주남, 생명을 담다
주남저수지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80년대 가창오리 5만여 마리가 도래하면서부터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기수 지역 낙동강 가운데 떠 있는 삼각주인 을숙도는 새들이 안전하게 쉴 수 있는 데다 먹이가 풍부해 과거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였다.
을숙도 가까이 하굿둑이 건설되고 주변이 아파트, 공장 등으로 개발되면서 철새들은 월동지를 점차 주남, 우포 쪽으로 바꾸었다.
주남에서는 세계적인 희귀조인 가창오리와 재두루미, 천연기념물인 노랑부리저어새와 흰꼬리수리, 큰기러기, 쇠기러기, 청둥오리, 물닭, 독수리, 개리 등 다양한 철새 수만 마리가 겨울을 보낸다.
철새 도래지는 여러 곳 있지만 철새를 가까이서 잘 볼 수 있는 곳은 주남만 한 곳이 없다. 근래 주남이 최고 철새 도래지로 꼽히게 된 이유다.
'꾸욱 꾹' '꽉 꽉' '찌익 찍' '삐릿 삐릿'. 두런거리는, 혹은 부산한 새들 소리다.
큰고니 소리가 제일 크고, 기러기들도 그 못지않게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몸집이 작아 목의 울림통이 크지 않은 새들은 지지배배 지저귀고 …. 노래인지 울음인지 그 소리를 문자로 표현할 길이 묘연하다.
새 소리를 한국인들은 흔히 울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루 종일 들판과 호수를 오가며 새들이 재잘대거나 질러대는 그 소리를 슬픔의 표현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힘과 기운이 가득한 떼창이었다.
창공을 가르는 새들의 합창은 주남을 채우고 있는 생명력을 말해주고 있었다.
벼를 수확하고 난 논에는 재두루미 500여 마리가 모여서 떨어진 낱알이나 볍씨를 쪼아 먹고 있었다. 재두루미는 주로 철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주남에 중간 기착한 뒤 계속 머물고 있었다. 창원시는 재두루미들이 먹을 수 있도록 볍씨를 뿌려준다.
재두루미 무리 옆에는 기러기들도 떼를 지어 앉아 열심히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기러기 몇 마리가 줄을 지어 아장아장 걸어갔다. 마치 음악 소리에 맞춘 듯이. 갑자기 기러기들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솔개 한 마리가 활강하며 내려왔기 때문이다.
재두루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기러기들도 별일 아니라는 듯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방지 감시원 몇 명이 군데군데 서서 탐방객이 재두루미 떼에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었다.
주남저수지는 큰 습지이다. 주남, 산남, 동판의 3개 저수지를 합해 주남저수지라고 통칭하는데 총면적이 898만㎡에 이른다.
우포늪이 국내 최대 자연 내륙습지이지만 습지의 수면 면적은 인공 저수지인 주남이 더 크다. 저수지 주변의 광활한 농토는 새들의 놀이터이자 먹이터가 되고 있었다.
창원시가 만들어준 무논에는 겨울인데도 물이 그득해 찰랑거렸고 고니, 오리, 노랑부리저어새 등이 물속을 헤집으며 먹이를 잡거나 혹은 놀고, 혹은 쉬고 있었다.
주남의 세 저수지를 하루에 돌아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다양한 생태와 환경을 감상할 수 있는 생태탐방로는 3개 구간이 조성돼 있었는데 짧은 것은 1.8㎞, 긴 것은 12㎞였다.
탐방로에는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할 수 있는 낙조대, 철새 탐조대 등이 설치돼 있다. 주남저수지는 멀리 금병산(271m), 정병산(556m), 구룡산(433m), 백월산(428m)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가 오면 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들어 주남에는 항상 수량이 넉넉하다. 구룡산과 백월산 사이로 넘어가는 낙조는 주남의 평화와 안식을 아름답게 비추었다.
우포, 원시의 시간을 담다
우포는 자연습지라는 점에서 주남과 구별된다. 우포는 한반도가 생성된 약 1억4천만 년 전에 형성됐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기원전 4천년쯤 지구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빙하가 녹은 물로 우포늪과 낙동강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동틀 무렵 수면 위로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나는 우포의 그윽한 풍광은 태곳적 자연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싶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갈대숲이 파스텔을 칠한 것처럼 뿌연 빛을 발하는 새벽에 나가면 우포를 감싸고 있는 태고의 신비가 느껴지는 듯하다. 우포는 크게 3포(우포, 목포, 사지포) 2벌(쪽지벌, 산밖벌)로 나뉜다. 이중 우포가 가장 큰 호수이다.
우포와 목포를 가르는 제방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징검다리가 있고, 다리는 갈대로 뒤덮인 옛 사초군락지로 이어진다. 사초군락지에는 왕버들 고목이 집단을 이루고 서 있었다.
잎사귀를 떨구고 굵은 둥치와 가지를 유감없이 드러낸 나목의 왕버들은 우포를 지키는 수호신인 마냥 신령스러웠다.
들짐승과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나 호수 깊숙이 들어앉은 큰고니들은 목청껏 노래하고 있었다. 사람이 지은 인공 구조물은 시야에 없었다.
사초 군락지가 끝나는 지점에 수리부엉이 암수 한 쌍이 사는 부엉덤이 있다.
현무암 절벽인 부엉덤에서 카메라 망원렌즈로 한참 찾은 끝에 수리부엉이 두 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거무스레한 현무암과 구분할 수 없는 보호색을 띠고 있어 맨눈으로는 찾을 수 없었다.
암컷은 알을 품고 앉아 있었고, 수컷은 암컷에게서 약 10m 떨어진 지점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이튿날 부엉덤을 다시 찾았을 때 먹이 잡으러 나갔는지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부엉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따오기복원센터가 있다. '따옥! 따옥!' 한 차례 따오기 소리를 듣고 카메라로 그 모습을 포착하기도 했지만, 녀석들은 쉽게 본색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조류인플루엔자 우려로 센터는 관람이 허락되지 않았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따옥따옥 소리 ∼ ∼' 동요가 불릴 정도로 민가 가까이 살아 사람과 친근했던 따오기는 1970년대 후반 자취를 감추었다. 2008년 중국에서 암수 1쌍을 도입해 복원 사업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약 1천 마리가 자연에 방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센터 부근에는 따오기에게 주는 먹이를 노리는 왜가리들이 여러 마리 날아와 있었다. 야생성을 잃은 따오기들은 먹이 쟁탈전에서 왜가리를 이기지 못한다.
자연 방사된 따오기의 생존율을 30% 정도로 추정하나 현재 몇 마리가 생존해 있는지는 미지수다.
우포와 목포를 훤히 내려다보는 제2 전망대에 다녀오는 길에 필자를 향해 내달려오는 노루 1마리를 마주쳤다. 옆길로 잽싸게 사라진다.
노란색과 남색 털의 담비 2마리도 카메라를 보더니 황급히 달아났다. 얼굴이 작고 허리가 긴 녀석들은 귀여운 생김새와 달리 무척 사납다.
우포에는 1천200여 종의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다. 가시연꽃, 수염마름 등 800여 종의 식물과 큰고니, 노랑부리저어새, 큰기러기 등 200여 종의 조류와 수달, 담비, 삵 등이 서식한다.
우포를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인, 장대 나룻배가 수면을 가르는 평화로운 경치는 사진에 담지 못했다. 철새들이 날아드는 겨울은 금어기여서 어민들이 배를 띄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포를 몇 번 거닐다 보니 새들은 노랫소리도 다르지만, 나는 모습도 제각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가벼운 백로나 왜가리들은 날개를 우아하게 너풀너풀 저으며 날았다. 몸집이 큰 기러기나 고니는 힘찬 날갯짓을 하며 날았다.
중력을 이기고 무거운 체중을 공중으로 띄우려면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큰고니는 수면 위를 열 발짝 정도 강하게 도움닫기를 한 뒤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지역 신문인 '비사벌신문' 편집국장이기도 한 오종식 창녕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우포에서 행복한가 아닌가는 자연을 즐길 줄 아느냐 모르냐에 달렸다"며 "우포를 오래 드나들다 보면 소리만으로 새를 식별하고, 새를 좋아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음 붙일 데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것에 기대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취지의 추사 김정희 어록이 떠올랐다. 자연을 즐길 줄 알면 마음 붙일 곳이 어디 하나뿐일까.
원시적인 정취가 흐르는 우포에서 새들이 인간의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내는 아늑한 모습은 사람이 자연에 내주어야 할 최소한의 몫을 생각하게 했다. 그 몫에 일찌감치 눈 떴더라면 세상은 지금 얼마나 달라져 있을 텐가. 곳곳에서 제2, 제3의 우포가 사람과 자연을 풍요롭게 하고 있을 것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3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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